Ch. 21 What is Justification and Is It Just?

ㅇ 전통적 칭의론의 모순
– 하나님의 칭의를 한편으로는 재판관이 피고인을 무죄라고 선고하는 행위에 비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판관이 범죄자를 사면하는 행위에 비유한다.
– 그러나 무죄선고와 사면은 구별되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서로 양립할 수 없다. 피고인을 무죄로 선고했으면 죄가 없으니 사면하거나 용서할 거리가 없다.

ㅇ 바울의 칭의 개념
– 하나님의 칭의는 순전히 선물이다. 그것은 정의가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공정한(just)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든 이방인에게든 믿음이라는 같은 근거로 칭의를 제공하시기 때문이다.
– 재판관은 자신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의롭다(righteous) 또는 불의(unrighteous)하다고 선고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법적 용어가 아니다. 무죄와 유죄가 법적 용어이다. 재판관은 사람의 인격을 근거로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 하나님이 판결 전에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에게 주입(infusion)함으로써 그를 무죄로 만들어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가? 이것은 로마카톨릭의 입장이다. 그러나 바울서신에서 그런 내용을 발견할 수 없다.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4:3) 여기서 하나님이 무죄함(innocence)을 아브라함에게 전가(imputation)하심으로써, 그가 그렇지 않은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는가? 이것은 개신교의 입장이다. 그러나 바울이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겨졌다고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고 말한 것을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죄인이 앞에 있는데 그가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신 것이다. 이렇게 여김을 받은 사람은 무죄하다고 선언을 받은 사람과 율법 앞에서 같은 신분을 가진다.
– 법원 소송이 시작되고나서 피고에 대한 고소가 효력을 상실하게 되는 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무죄가 선고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소가 기각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죄인을 그의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하시는 것은 그 믿음 때문에 고소를 기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무죄가 아니므로, 하나님이 그를 무죄라고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고소를 기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원래 죄가 없으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고소는 기각될 수밖에 없다.

ㅇ 칭의는 정의를 약화시키는가?
– 바울은 로마서 그 어디에서도 행악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이 정의를 어기는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즉 용서가 정의에 어긋난다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 한 속죄 이론은, 죄는 처벌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제 하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에 대해 벌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칭의교리와 배치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때문에 처벌 받았다면 그것은 대리처벌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처벌 받은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 죄에 대해 의롭다는 선언을 받지 않은 것이 된다. 고소가 기각되지 않은 것이다. 대리처벌론과 바울의 칭의론은 양립할 수 없다.

ㅇ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못 갖게 하시는가?
–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선택해서 믿음을 심어 주시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그러면 하나님은 불공정하신(unjust) 분이 아닌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을 갖기만 하면 의롭다 하시는 점에 있어서는 공정하시지만(just) 사람들에게 믿음을 선택적으로 주시는 점에 있어서는 불공정하시지 않은가?
– 서방 기독교를 형성는데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이러한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 해석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 왜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되었는가? 로마서 9장에서는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말도 있고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일도 거론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다른 사람은 택하시지 않으신다는 해석을 하게 된 것이다.
– 그러나 바울이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큰 맥락을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주제는 종국에 누가 구원을 얻는가가 아니고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패턴이다. 하나님은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서 특정 민족과 특정 사람들을 택해서 특별한 역할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바로를 강퍅하게 하시고 이스마엘 대신에 이삭을, 에서 대신에 야곱을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을 결국 구원에서 제외시키려고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다. 그들은 구속사에서 특정 역할을 하도록 선택되었을 뿐이다.
– 하나님이 누구는 선택해서 믿음을 주시고 누구는 버려둬서 믿음을 주지 않으신다는 말은 로마서의 내용과 다르다. 바울은 단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신다고 말한다. 바울은 칭의는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어디에서도 믿음은 선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ㅇ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 하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이 있는 사람을 의롭다 하신다. 그러면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 메시아 예수님인가 하나님인가?
– 아브라함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랐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칭의의 조건이라면 그것은 불공정하지(unjust) 않은가? 로마서 4장에서 칭의를 얻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었지 예수님이 아니었다.
– 로마서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을 믿고 의(율법)를 행하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행10:34-35; 롬2:12-14).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율법과 별도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충실함(pistis, faithfulness)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의이다(롬3:21-22). 예수님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율법을 지키는 형태를 띠었는데 예수님 후에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형태를 띤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의롭다 함을 얻는다.

ㅇ 칭의, 성화, 화목
– 하나님을 합당하게 경외하지 않고 이웃을 부당하게 대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부당하게 대우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칭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생긴 균열을 치유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우리는 칭의 덕분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 그러나 하나님과 완전하게 화목하는 데는 칭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성품이 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에 노예가 되는 대신에 다른 힘에 노예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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