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식 이해 5: 예배의식 해설

본문: 히12:18-29

2010년 2월 7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갱신의식임을 말씀드렸고, 예배는 구약제사제도의 순서를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교회의 예배의식에 대하여 그 절차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여러분께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난 설교들에서도 제가 직간접적으로 말씀을 드렸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구약 때는 예배를 드릴 때 정해진 형식과 절차를 지키는 일이 매우 중요했지만 신약 때는 형식과 절차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때는 정해진 형식을 따르지 않으면 당장 하나님의 징계가 따랐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자신들의 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가 죽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대제사장도 지성소에 잘못 들어가면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약 때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런 물질적인 형식에 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은 전에 말씀드려서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사람들이 예배형식을 소홀히 하는 데는 예배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몰이해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사람들은 우리의 예배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지에 대하여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히브리서 12:18-29를 통하여 이 문제를 더 자세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18-21절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던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불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 가운데 나타나셨고, 산을 조금이라도 올라오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가 무서워서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모세도 두렵고 떨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두려움은 시내산이 성막으로 대체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고, 그 후에도 언약궤를 들여다봤다가 70명이 죽었으며 (삼상6:19), 언약궤를 운반하는 소가 뛰는 바람에 언약궤를 붙잡았던 웃사도 죽었습니다(삼하6:6-7).

이런 무시무시한 일들 때문에 구약 때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그 절차를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 뇌리에 박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배 때 하나님께 잘못 나가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임할 때 가져야 하는 경건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또 구약 때는 눈에 보이는 형상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냈습니다. 시내산의 불과 구름이나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특히 그 안의 세키나) 등이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예배당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의식을 가지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생각하면 그냥 가서 찬송 몇 곡 부르고 목사님의 좋은 설교 말씀 듣는 것만 떠오릅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예배 형식과 절차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격식도 없이 대충 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적셔주는 은혜로운 찬송과 우리를 감동시키는 목사님의 설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신약의 예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먼저 22-24절에서는 우리가 예배드릴 때 이르게 되는 곳이 어디인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입니다. 즉, 우리가 예배 때 이르는 곳은 하늘의 예루살렘, 곧 천군천사가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존전입니다.

이 내용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 때 우리가 이르는 곳이 구약 때보다 훨씬 더 좋고 영광스러운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늘의 예루살렘을 거창하게 묘사한 목적은 딴 데 있습니다. 본문의 초점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경외심)입니다. 앞의 18-21절에서는 이 두려움이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현현, 즉 불, 구름, 천둥 때문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22-24절에서는 시내산과 같이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강림하신 곳이 아닌, 보다 더 위엄에 차 있고 영광스러운 곳, 즉 하나님의 보좌 자체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 때 우리가 이르는 곳은 바로 이 하나님의 보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 때의 예배와 신약 때의 예배 중 어떤 것에 더 경외심을 가지고 주의하여 임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히브리서 저자가 25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한[1]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구약에서 땅에서 난 사람인 모세가 한 경고를 거역한 사람들이 징벌을 피하지 못했는데, 신약에서 하늘에서 난 분인 예수님을 거역하면 그 징벌이 얼마나 더 크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논의의 결론을 28-29절에서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그러나 이 부분은 ESV의 번역이 훨씬 더 저자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Therefore let us be grateful for receiving a kingdom that cannot be shaken, and thus let us offer to God acceptable worship, with reverence and awe,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즉,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으니 감사합시다. 그리고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립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구약의 시내산보다 더 거룩한─따라서 더 위험한─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니,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자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2]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께서 응당한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를 드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교회의 예배의식을 살펴봐야 할 차례인데, 그 전에 한 가지 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예배 때 목사의 역할입니다. 전에 제가 예배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고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누군가가 있어야겠지요.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목사입니다. 예배 때 목사는 한편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섬기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배로 부르고, 죄사함을 선포하고, 설교하고, 성찬을 주는 일을 표면적으로는 목사가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자 그럼, 우리 교회의 예배의식을 살펴 보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예배할 때 우리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제 설명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을 예배하라고 부르십니다. 이 때 목사는 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성경구절, 특히 시편의 관련된 내용을 가지고 회중들을 하나님께로 부릅니다. 예를 들어 목사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라고 외칩니다(시95:1-3). 이에 대하여 회중은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화답합니다. 즉,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갑니다”(시100:4).

다음으로 목사가 양 손을 들고 “Grace to you and peace,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이라고 회중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이 중 앞 부분은 서신서들에 많이 나오는 표현을 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은 로마서 1:7에서 다음과 같이 축복을 합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뒷 부분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분이 누구이고 우리가 예배드리는 대상이 어떤 분인지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즉, 우리는 홀로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명시합니다.

이 축복에 이어서 목사는 “The Lord be with you!”라고 회중에게 인사하고 회중은 “And also with you!”라고 응답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를 비는 이스라엘의 언약적 인사 방법입니다. 아시다시피 언약의 핵심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언약에 따라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예: 룻2:4의 보아스의 인사).[3] 예배 때 목사와 회중이 이 인사를 나눌 때, 이것은 목사는 회중들이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를 바라고, 회중들은 목사가 예배를 인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다음에는 목사와 회중이 무릎꿇고 죄를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목사가 일어서서 회중을 일으켜 세우고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해졌음을 선포합니다. 이 죄 사함의 선포는 형식적으로는 목사가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에게서 죄사함의 은혜를 받은 회중은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으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 때 희생제물의 피를 번제단에 뿌리고 그 피를 힘입어 번제단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또 그 피를 힘입어 성소와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만 또는 우리 교회사람들끼리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12:22-24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의 천군천사와 이미 죽은 성도들과 함께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구약 때는 시내산에서 또는 성막이나 성전에서, 즉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신약 때는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표면적으로는 예배장소가 예배당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늘이 열리고 우리가 하늘나라로 들어올려져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게 됨을 뜻합니다. 이 놀라운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27:51). 예수님의 대속 사역이 아담의 범죄 이후로 굳게 닫혔던 하늘 문을 우리를 위하여 열어 제쳤고 우리는 그 피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한 후 회중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도록 기도하고, 우리가 들어 올려져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 곳, 하늘나라의 영광이 땅에도 임하도록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다음에는 회중대표가 성경봉독을 하고 목사가 설교를 합니다. 이 때 성경봉독자는 읽기를 마친 후에 “This is the Word of the Lord!”라고 말함으로써 성경을 읽은 사람은 자신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표시합니다. 이것은 목사가 설교 본문을 읽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똑같이 “This is the Word of the Lord!”라고 말하고 나서 설교를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을 빌어 말씀하고 계심을 표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칼이 희생제물을 찔러 쪼개듯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찔러 쪼개는 과정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지기에 적합하도록 변화시키시는 과정입니다.

설교 후에 회중은 니케아신조로 신앙을 고백하고 헌금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헌금을 바치는 것은 단지 돈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재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분은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애쓴 결과물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헌금을 드릴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 전부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번제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농사지은 곡물가루를 희생제물 위에 올려서 같이 불에 태우는 행위의 신약적 의미입니다. 즉, 희생제물은 우리를 상징하고 곡물가루는 우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 예배의식에는 명확히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성찬을 위해서 쓰일 빵과 포도주도 이 때 바쳐지면서 우리를 하나님께 바치게 됩니다.

다음 절차인 성찬은 우리 예배의 정점입니다. 예배 전에 죄인이었던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어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단의 제물에서 올라오는 향기를 음미하시듯 우리와 우리의 삶에서 나오는 향기를 음미하십니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반목하는 사이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같이 식사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되새기면서 침울하게만 드리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서 하나님과 친밀한 식사를 나누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한편 성찬은 하나님께서 예배 후에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시기 전에 우리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써, 즉 신령한 떡과 신령한 음료로써 먹이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그 분의 능력으로 강건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먹이신 후에는,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도 비록 목사가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목사가 축도를 할 때 회중은 눈을 감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축도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축도는 목사가 회중을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목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축도의 원문인 고린도후서 13:13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눈을 크게 뜨고 목사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한껏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의 예배의식을 순서대로 쭉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배의 각 절차들을 살펴보면 그 안에 어떤 흐름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그리고 ‘반목에서 화목으로’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배 때 우리의 자세의 변화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죄의 용서를 받은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얼굴을 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앉히시고는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마지막으로 성찬 때는 비스듬히 기대서 식사를 합니다. 우리가 성찬식 때 실제로 몸을 비스듬히 눕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전통을 따르자면 식사 때는 몸을 편안한 자세로 비스듬히 눕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편안히 기대서 유월절 식사를 했듯이 우리도 하나님 품에 편안히 기대서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단지 비유가 아니고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영적인 차원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과정을 다시 한번 마음에 그려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을 예배하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궁정 문을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는 순간 우리는 그 앞에 엎드러집니다. 우리가 일주일 간 지은 죄 때문에 그 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통회하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인자한 얼굴로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리에 앉히시고 그 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하나하나 변화시키십니다.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검으로 변화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열매와 함께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표시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같이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를 나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 오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충전이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하나님의 궁정을 나와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남을 믿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예배가 시작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고, 죄사함의 선포를 들을 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느껴야 하고,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천둥소리와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하고, 빵과 포도주를 먹을 때 하나님의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맛봐야 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배 때마다 이 예배당에 하늘나라가 임하여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남을 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개역개정에는 ‘경고하신’으로 되어 있음. 그러나 이는 모세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므로 ‘경고한’으로 번역해야 함.

[2] 물론 히브리서 저자는 두려움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 즉 하나님의 나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음.

[3] 룻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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