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본문: 골2:8-15
2018년 4월 15일
바로그교회 주일예배 설교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 사실을 확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또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 중의 일부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먼저 흥미롭게도 11-12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의 세례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세례의 전신은 할례입니다. 그러면 할례와 부활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할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할례는 육 즉 살을 끊어내는 의식입니다. 육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사르’와 헬라어 ‘사르크스’는 우리 말 성경에 ‘육,’ ‘육신,’ ‘육체’ 등 다양한 말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래 뜻은 ‘살’입니다. 살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상처를 받을 수 있고 결국에는 썩어 없어집니다. 이러한 살의 특성은 연약하고 필멸적(必滅的) 인 우리 인간의 특성을 아주 잘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연약성과 필멸성을 묘사할 때 ‘살’ 즉 ‘육’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존재 즉 연약하고 필멸적 존재인 우리는 우리가 상처를 당할까봐 또 우리가 죽음을 당할까봐 온갖 죄성을 만들어냅니다. 이를 한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합니다.

“손실, 부족, 죽음, 손상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보호욕구를 낳고 보호욕구는 폭력과 공격을 낳는다. 약함은 힘과 정력을 자랑하게 만든다. 그래서 죽음의 두려움(육적 연약함) 속에 사는 사람들은 ‘불안, 낮은 자존감, 강박, 완벽주의뿐만 아니라 야심, 시기, 자아도취, 질투, 경쟁의식, 자의식, 죄책감, 수치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성들과 문제점들이 다 이 안에 있지 않습니까? 할례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율법은 타락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육적인 성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이런 역할은 육을 잘라내는 할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살 즉 물리적 육을 잘라내는 할례는 육적 성향을 잘라내는 것을 상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다 할례를 받아야 했고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 백성 중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창17:13-14).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자신들의 육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본을 보임으로써 이방민족들도 같이 육을 제거하도록 이끄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육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23절이 잘 말해 주듯이 율법은 어떤 외적 종교성만 낳을 뿐 인간의 육적 성향을 제거하는 데는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은 육적 성향 즉 죄성만 부추겼습니다. “…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롬7:7-8).

이것이 바로 본문 8절이 말하는 바입니다. 바울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철학과 초등학문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단어보다 그 의미 범위가 훨씬 넓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사상이든 다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종교도 철학의 범주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여기서 철학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요? 당연히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즉 구약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입니다. 이런 사실은 본문과 내용이 바로 이어지는 구절인 1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구약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유대주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 ‘철학’을 ‘초등학문’이라고 표현하는데, 20-23절에서 초등학문이 구약율법을 가리키는 것을 봐도 바울 사도가 염두에 둔 철학은 여전히 구약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서서 바울 사도는 율법은 인간의 육을 제거하는 데 소용이 없으니 신성이 충만하게 거하는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곧 11절에서도 언급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충만한 신성 즉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을 이겼는데, 이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서도 충만하여 육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 사도는 뜬금 없어 보이는 말을 덧붙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언뜻 보면 뜬금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곧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바울 사도의 의도가 가득 담긴 구절입니다.

한편 11-12절에서는 앞 절을 이어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신성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으로 한 할례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즉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때에는 할례 때와 달리 성령님께서 임하시기 때문에 효과가 다릅니다. 할례는 물리적 육을 끊어내는 반면에 세례는 삶의 원리로서의 육을 끊어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 사도는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의 할례를 그리스도께서 먼저 받으셨고 이어서 그리스도인이 같은 원리를 따라서(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마음의 할례를 받으셨을까요? 어떻게 마음의 육을 끊어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 자신의 육 즉 연약성에 기인하는 유혹을 극복하는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을 하나님께 맡기시는 시험을 받으셨고 왕국을 얼른 취할 욕심으로 사탄의 방법을 따르는 것을 거절하는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공생애 마지막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는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자신의 연약한 육 쪽에서는 계속 뭐하러 죽느냐고 속삭이는데 그 유혹을 뿌리치고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살리려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육을 죽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육을 벗은 신령한 존재로 부활시키셨습니다.

12절은 예수님의 이러한 죽음과 부활이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세례가 단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의식이나 교회에 들어가는 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을 죽이시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신령한 존재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육을 죽이고 신령한 존재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육의 원리를 극복하고 성령님의 신령한 원리를 따라 사시게 된 것처럼 우리도 육적 성향을 벗어버리고 성령님의 신령한 원리를 따라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거듭 난 것을 개인경건 영역에만 한정하기 쉽습니다. 그냥 우리의 마음이 더 거룩해지고 우리의 가정이 더 나아지는 것을 넘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는 10절의 말씀이 우리가 세례를 받아서 죽고 부활했다는 의미를 개인 영역에만 제한하지 못하게 합니다. 실제로 15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고 만방에 구경거리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이 구절이 우리 개역개정판 성경과 다르게 헬라어 원문에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심으로써’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고 구경거리로 만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로 번역되어 있는 구도 원래는 ‘ἐν αὐτῷ’(엔 아우토)인데 이것은 영어로 치면 ‘in it (in the cross)’도 될 수 있고 ‘in him (in Christ)’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그것으로(십자가로)’도 될 수 있고 ‘그로(그리스도로)’ 또는 ‘그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13절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엔 아우토’를 ‘그리스도로’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이기셔서 그들을 무력화하시고 구경거리로 삼으신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육의 원리를 결정적으로 이기심으로써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공표하심으로써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신학자들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존재들 즉 타락한 천사들인지 아니면 보이는 존재들 즉 세상의 통치자들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그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보았던 육적인 원리로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세상을 불의와 악이 가득 찬 곳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권력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강압과 무력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자신들이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자신들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께서 등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통치자이셨습니다. 메시아로 오셨는데 메시아는 하나님나라를 다스리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통치자로서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육의 원리를 따라 다스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폭력과 강압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때까지의 모든 통치자들과 달리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백성들을 섬기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악한 통치자들과 권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육의 원리를 무력화시키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새로운 통치원리를 들여 오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신 일은 우리 개인 영역을 넘어서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시키셨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재림 때에 무력화시키실 거라고 말하지 않고 2천년 전에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무력화시키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세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을 미래의 일로만 보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가장 자세히 말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십시오. 우리는 흔히 성경의 이 마지막 장들이 예수님 재림 후의 세상만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 나오고 그 분들이 우리와 함께 사시는 등 놀랄 만큼 영광스러운 모습을 묘사하고 있고, 다시 저주가 없으며 눈물도 슬픔도 사망도 없는 등 예수님의 재림 후에나 가능할 일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22:1-3; 21:4).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은 영광스럽지만 그 성 밖에는 여전히 악이 있다고 묘사하는 구절들을 보십시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사실 새 예루살렘성은 9-10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린 양의 신부 즉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장들은 교회가 있고 교회 밖에는 불신자들이 있는 지금 세상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은 불완전하나마 이미 나타났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천국이 불완전하나마 이 땅에 이미 임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여전히 악이 횡행하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직 새 세상이 아니라면 여전히 죄를 저지르고 있는 우리를 왜 성경은 새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 문제를 현상과 본질이라는 두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현상적으로는 아직 옛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거듭 났을 때 이미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여전히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상적으로는 아직 옛 하늘과 옛 땅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셨을 때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습니다.

한편 현상적으로 옛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 안에 진보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성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현상적으로 옛 하늘과 옛 땅이라고 해서 세상 안에 진보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성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성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은 우리가 믿을 때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오셔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안에 성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은 오순절날 세상에 성령님께서 오셔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죄와 싸워야 성화되는 것처럼 우리가 열심히 불의와 싸워야 세상이 나아집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싸움은 성공 기약이 없는 허망한 바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을 죽이고 부활하심으로써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육의 원리가 치명적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이루신 일을 마무리하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니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꿈꾸며 바라보셨던 하나님나라를 우리도 바라봅시다. 이 땅에 육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물러가고 성령님의 원리가 다스리는 세상이 오도록 힘을 다합시다. 이 땅에 미움과 불의와 싸움이 가득한 세상이 물러가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흐르는 세상이 오도록 분투합시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