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식 이해 4: 성찬의 의미

                                                                                                       2010년 1월 24일

본문: 요6:22-59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여러분은 성찬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더 구체적으로 질문한다면,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또 성찬이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개신교인들은 다음의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같습니다.

첫째, 우리가 먹는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찢긴 몸과 흘린 피를 상징하므로 우리가 성찬에 임할 때는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묵상해야 하고, 그러면 이 묵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대속사역의 의미를 더 깨닫게 되고 이를 통하여 우리 영혼이 유익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찬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기념하는 행위일 뿐이고 우리는 그 기념행위가 가리키는 실체를 생각해봄으로써 유익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이보다 더 진일보한 견해를 주장합니다. 이들은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는 아니지만, 우리가 성찬에 임할 때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셔서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또 그 유익이 뭔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냥 신비로운 영적 유익이 우리에게 미친다고만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 알 듯 모를 듯한 주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 즉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니 성찬이 갖는 의미를 바로 아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이 성찬의 의미를 모두 포괄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 의미의 일부이지만 아주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구약의 제사제도 특히 번제(승제)와 예배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제물을 잡고 피를 뿌리는 것은 죄의 고백과 용서에 상응하고, 제물을 잘게 쪼개는 것은 성경봉독과 설교에 상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성찬에 상응하는 것은 뭐라고 말씀드렸죠? 제물이 불에 타서 하늘로 연기가 되어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제물을 불로 태우는 행위는 성찬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연기의 향기를 맡으시는 부분만 성찬에 해당됩니다. 성경에서 불이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지난번에 본 나답과 아비후 사건처럼 불은 태워 없애 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지요. 두번째는 불은 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말라기 3장 2-3절에서는 언약의 사자가 레위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을 예언하는데, 그것을 불이 금과 은을 제련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번제 때 제물을 태우는 불의 역할은 위의 것들 중 두번째에 해당됩니다. 맹렬한 불이 금광석에 있는 찌꺼기를 제거하여 순금을 만들어 내듯이 번제단의 불은 제물을 정결하게 만들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제물을 불로 태우는 과정은 칼로 쪼개는 과정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우리가 칼로 쪼개지고 불로 태워져서 정화되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 입구에 화염검(불칼)을 두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신 에덴동산에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려면 이 칼과 불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칼로 쪼개지고 불로 태워져야 합니다.

아무튼 번제는 우리가 성찬에 대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면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는 보통 성찬식 때는 무엇인가 받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는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번제는 성찬 때 우리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서 바쳐지는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고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받는가? 지금부터 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찬식에 해당하는 구약의 전신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번제에서 연기가 올라가는 부분이라고 말씀드렸고, 또 제사 중 화목제가 특히 성찬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이 성찬식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구약의 행위는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언제 제정하셨지요? 잡히시던 날 밤, 유월절날입니다 (마26:17-30). 사실 예수님께서는 성찬식을 유월절 식사 중에 제정하셨습니다. 유월절 식사 때 양고기와 더불어 빵과 포도주도 먹는데, 이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과 나누시면서 성찬식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찬의 전신은 구약의 유월절 식사가 됩니다.

그럼 유월절 식사는 그냥 보통의 식사였을까요? 아닙니다. 출애굽기나 다른 구약의 구절들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럼 이 제사는 어떤 제사였을까요? 화목제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제사자가 제물을 먹는 제사는 화목제밖에 없습니다. 번제 때는 모두 다 태우고, 속죄제 때는 제사장만 먹습니다. 반면에 화목제 때는 제사자가 하나님과의 화목의 상징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물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때도 제사자와 그 가족들이 제물을 먹으니까 유월절의 제사는 기본적으로 화목제입니다. 따라서 유월절에 제정된 성찬도 기본적으로 화목제가 됩니다.

화목제에서 제물은 제사자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화목제의 제물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사실은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부르고, 또 로마서 3장 25절에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1] 그런데 화목제 때 보면 제물 중 기름 부분은 하나님께 바치고 고기 부분은 제사자가 먹습니다(레위기 3장, 7장. 이것은 성찬식 때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제물을 우리가 하나님과 나눠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기름 부분, 우리는 고기 부분, 이렇게 나눠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기에 감히 하나님과 무엇을 나눠 가질 수 있습니까? 십일조를 드릴 때 우리가 우리의 소득을 1:9로 하나님과 나눠 가집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십분의 일을 드릴 때 그것은 우리의 모든 소득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중의 십분의 구를 우리에게 다시 돌려 주시는 것입니다.

화목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자가 기름부분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는 모든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그 중의 고기 부분만 하나님께서 다시 제사자에게 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자는 제물의 기름이 번제단에서 태워진 후에야 고기를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찬 때도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예수님이 먼저 하나님께 바쳐지고 나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성찬 때에 예수님께서 바쳐진다는 게 무엇인가?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미사 때마다 희생제물로 드려진다는 것을 말하는가? 이 질문은 왜 성찬 때 양고기는 안 먹고 빵과 포도주만 먹는가 하는 질문과 관계 있습니다. 성찬은 구약의 화목제를 이어받은 것인데, 왜 화목제에서처럼 양고기를 먹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한 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동물의 희생제사가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찬 때 예수님께서 바쳐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질문은 성찬 때 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빵은 무엇으로 만듭니까? 밀입니다. 그리고 밀은 씨 맺는 식물입니다. 그럼 포도주는 무엇으로 만듭니까? 포도입니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씨 맺는 식물과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어디서 많이 본 표현이지요? 예, 창세기 1장입니다. 창세기 1장 11-12절에는 하나님께서 씨 맺는 식물과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만드시는 장면이 나오고, 26-29절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신 다음 사람에게 먹거리로 온 땅의 씨 맺는 모든 식물과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2]

왜 이런 언급이 있을까요? 세상을 다스리는 문제야 지극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먹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먹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특별히 말씀하셨다는 것은 인간은 애초부터 배고픈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존재 말입니다. 이런 배고픈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먹거리를 풍성하게 베푸셨습니다. 이런 풍성한 먹거리에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아담이 배고픈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의 육체적 주림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적으로도 주린 자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베푸신 먹거리들을 먹으면서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을 먹는 한 그는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함으로 먹는 한 그는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먹거리 뒤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먹거리 자체에 가치가 있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창세기 3:6을 보십시오. “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자체가 지혜를 주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지혜를 주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삽니다. 하지만 그 음식들 안에 생명이 있습니까? 실제로는 다 죽은 것들이죠. 여러분이 김치를 먹을 때는 그것들은 이미 죽은 배추들이요, 여러분이 갈비를 먹을 때는 그것은 이미 죽은 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명이 없는 음식을 먹은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죽은 것들이 우리 몸 안에서 생명으로 변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소의 죽은 세포를 우리의 산 세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아담은 우리가 공기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마시는 것이고, 우리가 먹거리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먹는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공기 자체, 먹거리 자체에 생명이 있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피조계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생명이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생명이 자신들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들 능력만 가지고 한번 살아봐라’ 하고 놔두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우리 힘만으로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영생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패역한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 성자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대표되는 피조계를 취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는 이 땅의 것을 먹고 마셨습니다. 이것은 이 땅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 땅과 즉 피조계와 하나가 된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아담과 달리 모든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온 다는 것을 알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7절에서는 예수님의 이런 인식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그리고 마태복음 6장 27절에서는 모든 양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옛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지만, 새 아담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아담이 저지른 모든 잘못을 예수님께서 되돌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로 인해 아담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끊겼던 피조계가 다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바치신 것이 성찬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찬 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빵과 포도주를 바칩니다. 이것은 우리의 먹거리 전부를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암시적으로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빵은 씨 맺는 식물 모두를 대표하고 우리의 포도주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모두를 대표합니다. 따라서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먹을 거리 전부를 상징합니다. 또 우리의 먹거리는 우리 몸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살과 피가 되므로, 먹거리를 대표하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살과 피를 상징하고 우리를 상징하며 우리가 대표하는 피조계 전체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 때 빵과 포도주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우리가 온 피조계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바침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 때 동물제물이 그 자체로는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없었던 이치와 같습니다. 황소나 염소도 모두 아담의 타락의 영향을 받아 불완전하게 되었습니다. 황소나 염소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들이 장차 올 완전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완전한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찬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완전한 순종과 감사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가운데 계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라야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피조계를 대표하는 인성과 하나님을 대표하는 신성이 완전하게 연합된 이 예수님 안에서라야 온 피조계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자, 화목하게 되었으면 같이 식사를 해야지요. 그럼 하나님의 음식은 무엇이고 우리의 음식은 무엇일까요? 성찬 때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즉,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먹으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먹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친밀한 연합 가운데 들어가게 됨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실 때 그 예수님의 살과 피는 이미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그 살과 피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 모든 삶을 감사 가운데 사신 그 순종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신 그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안에 이미 서로 하나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그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 모든 것들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복락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우리가 먹고 마시면서 우리의 살과 피 즉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갑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존재로 변화되어 갑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떡(빵)입니다. 그분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분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그분의 피를 먹고 마시면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요한복음 6장 53-5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음식 자체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음식을 먹는다 해도 결국은 죽고 맙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을 궁극적으로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감사해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40일간 주리신 후 마귀에게 돌덩어리를 떡덩어리로 바꿔서 먹으라는 시험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면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매주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님의 시험의 교훈을 우리가 되새기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것들, 양식, 옷, 집 등의 물질뿐만 아니라 지식, 예술, 문화 등의 정신적인 것들까지도 모두 그것들 자체에 가치를 두지 않고, 그 모든 것들에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 우리 성경에는 ‘씨 맺는 식물’이 ‘씨 맺는 채소’로 되어 있는데, 바른 번역은 ‘채소’가 아니고 ‘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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