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과 구속사

본문: 요일3:8
2011년 3월 27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임무가 무엇인지 알아 보았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일을 하면서 그곳을 사탄으로부터 지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피조물들을 활용하여 에덴동산에서 문명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바깥 세상에까지 영광스러운 문명을 건설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탄은 창조계가 이렇게 잘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자신이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인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 없이 살도록 부추겼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도록 부추겼습니다. 결국 이 꾐에 아담이 넘어감으로써 세상에 죄가 들어와서 그 아름답던 창조계가 다 망가졌습니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망가진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이야기와 사건들로 구성돼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절정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교리, 즉 예수님의 속죄 교리는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교회의 중심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일까요? 여러분은 어느 교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좀 바꿔서 질문한다면 교회역사상 어느 교리가 가장 먼저 다뤄지고 또 확정되었습니까? 최초의 기독교회의인 니케아공의회가 어느 교리를 다루기 위해서 열렸습니까? 삼위일체교리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교리가 기독교 전체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럼 다음으로 중요한 교리는 무엇일까요? 어느 교리가 교회역사상 두번째로 다뤄지고 또 확정되었습니까? 칼케돈 공의회는 어느 교리를 다루기 위해서 열렸습니까? 성육신 교리, 즉 일위이성(一位二性) 교리입니다.

사실 이 두 교리 즉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는 속죄 교리의 바탕이 됩니다. 속죄 교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좀 더 상세하게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성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세상의 죄를 속죄하려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 속죄의 효력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속죄 교리는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성령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 두 개가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죠. 말하자면 삼위일체와 성육신이 속죄의 선행 조건입니다. 세상의 속죄가 가능하려면 삼위일체와 성육신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 시점에서 우리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삼위일체와 성육신은 단지 속죄 때문에 필요했을까? 다시 말해서 단지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셔야 했고 또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했을까?” 이 중 첫번째 부분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과 관계 없이 삼위로 계십니다. 그럼 두번째인 성육신은 어떻습니까? 성육신도 아담의 타락과 관계 없이 필요했을까요? 아니면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일어났을까요? 이에 대하여 우리는 보통 성육신은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성육신의 목적은 세상 죄를 속죄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으니 인간이 그 값을 치러야 했는데 모든 인류의 죄를 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으니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대신 그 죄값을 치러야 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로 틀렸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인성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성육신의 목적은 세상 죄의 속죄를 넘어선다고 봐야 합니다. 성육신의 목적이 단지 속죄뿐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는 인성을 유지하고 계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임무를 완수하셨는데 왜 인성을 붙들고 계셔야 합니까? 인성을 취하시게 한 원인이 해결됐으니 이제 홀가분하게 인성을 벗어버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복잡하게 신성과 인성을 한 존재 안에 결합시키고 있을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인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왜요? 성육신의 목적은 단지 속죄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육신은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을 따르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아담의 타락은 유익하고 필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 중의 하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 즉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의 결혼입니다. 그런데 이 결혼이 가능하려면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결혼인 성육신이 필요합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인간과 하나님 간에 연결 고리가 생기고, 그 때에야 인간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육신이 단지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면, 아담의 타락 덕분에 그리스도와 교회가 결혼을 하게 됐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더라면 그런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는 졸지에 아담의 타락을 선하고 유익했던 사건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디를 보든 아담의 타락을 악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육신은 아담의 타락과 관계 없이 필요했던 사건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럼 성육신이 어떻게 아담의 타락과 상관 없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자 그럼 상상력을 발휘해서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탄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아담, 하와, 그런 과일말고 이것도 한번 먹어 봐. 얼마나 탐스럽고 먹음직해. 이거 먹으면 너희들은 바로 왕과 왕비가 될거야.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단 말야. 자 한 입 먹어 봐. 얼른!” 아담은 이 교활한 사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칩니다. “안 돼! 그거 먹으면 죽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단 말야.”

사탄은 포기하지 않고 기회만 되면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을 계속 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런 아담의 신실한 순종에 하나님은 선물로서 보답하십니다. 바로 선악과를 따 먹어 세상의 통치자가 되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는 것은 아담이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형태로 주어집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담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인간 또는 인간 하나님은 인류를 끊임 없이 유혹하고 괴롭혀 왔던 사탄을 영원히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영원한 통치자가 되어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들도 그와 연합하여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게 됩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에도 이처럼 성육신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담은 사탄의 첫번째 유혹에 바로 넘어갔습니다. 그는 선악과를 너무 일찍 먹어 버렸고 따라서 너무 이르게 왕이 되었습니다. 아직 세상을 다스릴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결정을 존중하셔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바깥으로 내보내셨습니다. 바깥에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험한 세상을 다스리려고 열심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직 준비가 덜 된 그들은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가인계열뿐만 아니라 셋계열까지도 심각하게 타락해 버렸습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대홍수로 멸망시키셨습니다.

대홍수가 끝난 후 물이 걷히고 나서 새 땅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새 땅에 새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에 새 아담을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가나안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아담과 똑같은 임무 즉 그 땅을 경작하며 지키라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다스리면서 그 거룩한 땅을 사탄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신들이 세상을 다스리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임무에 실패한 아담의 교훈에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서 징계를 받을 때마다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좋은 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까지도 자신들의 문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망한 이유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율법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나라가 빨리 회복되지 않자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보다 더 철저한 안식일법, 정결규례법, 할례법 등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율법들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영화로운 하나님의 왕국으로 회복시키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이스라엘이 다시 영화로운 하나님의 왕국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게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가상했지만 그들은 핵심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좋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부인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좋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죽음을 통한 변환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단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잘 준비된 왕이 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변환시켜 주시도록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하루빨리 왕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아담의 실패를 되풀이했습니다. 사탄을 이스라엘에서 몰아냈어야 했지만 오히려 사탄의 길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새 아담도 실패했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담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새 아담과 새 이스라엘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스라엘과 달리 급하게 왕이 되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이스라엘과 달리 좋은 왕이 되기에는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 없이 바로 왕이 되라는 사탄의 달콤한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마4:8-10). 쉬운 길을 버리고 힘든 길을 택하셨습니다. 영광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5:8). 예수님께서 이렇게 순종하시자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허락하셨습니다. 바로 십자가 나무입니다. 이에 그는 선악과를 먹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애초에 선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었기 때문에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영화롭게 변화되어 하늘에 오르셔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는 아담이 실패한 것을 성공하신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즉 그들은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같이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부활하고 그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도록 그와 함께 하늘에 앉혀졌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2:4-6).

그들은 또한 참 아담과 참 이스라엘로서 아담과 이스라엘이 실패한 임무 한 가지를 성공했습니다. 즉 사탄을 그들 중에서 몰아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이 보여 주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입니다. 교회는 새 예루살렘이고 거룩한 성입니다. 교회는 니케아신조가 “우리는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한 교회를 믿으며”라고 가르치듯이 성도 즉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자신을 정결하게 유지합니다. 사탄적인 것은 무엇이든 자기 안에서 몰아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교회는 사탄을 자신의 영역에서 몰아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순종하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왕으로 세우시고 사도행전이 보여 주듯 교회를 세상으로, 즉 사마리아로, 소아시로, 유럽으로 내보내셨습니다. 교회는 지금 세상에서 사탄과 싸우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이 아담 때에도 일어났습니다. 그도 사탄과 싸우도록 세상에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와 그 후손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그 싸움에서 성공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로마서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라고 증언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탄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그 궁극적인 승리는 궁극적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보았듯이 아담의 타락과 상관 없이 성육신은 필요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성자 하나님은 사탄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세상의 역사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수많은 실수와 악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실패를 되돌리려고 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하시지 않아도 되었을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임무,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단지 아담의 실패를 되돌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의도는 창조계의 현상유지가 아니었습니다. 창조 후에 모든 것이 좋고 영광스러웠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 곳에는 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있었고, 아담과 하와는 아무 영화로운 의복도 없이 벌거벗은 상태였으며, 동산은 아무 문명도 없이 원시적인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태를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그 임무를 맡을 자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세상을 온통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을 이용한 사탄의 계략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 인간 또는 인간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신에게 연합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계시고 또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정말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으시면 요한계시록 21장을 한번 보십시오. 거기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는 어둠도 없고 사람들도 영화로운 문명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2-26절).

아담의 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지 못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의 보혈은 그의 모든 죄와 실패를 덮고도 남았습니다. 그의 희생으로 세상은 지금 더 영광스러운 상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동산에서 성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미숙에서 성숙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권능으로 이 영광스러운 사명을 이루어나가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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