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15 What is Forgiveness?

ㅇ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의 역사적 의미
– 구약은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거듭 말하지만 사람이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한번도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따라서 용서를 가르치고 실천하신 예수님의 행위는 용서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새로운 사건이었다고 주장한 Hannah Arendt의 말은 옳다. * 구약 때의 인류는 아직 덜 성숙한 상태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먼저 행위로 용서를 가르치시고는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라고 명령하셨다.
–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서로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긴밀하게 얽혀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런 발견을 하게 되었다. 우리를 부당하게 대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부당대우한 사람들을 용서하듯이 하나님이 하나님을 부당대우한 우리를 용서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ㅇ 용서는 정의를 어기는 것인가
– 오랫동안 사람들은 용서가 정의를 어긴다고 생각해 왔다.
– 고대의 정의는 대상에게 받아 마땅한 것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행악자가 받아 마땅한 것은 처벌이다. 그래서 안셀무스는 용서는 행악자를 처벌하지 않기를 요구하고 정의는 처벌하기를 요구하므로 용서는 정의를 어긴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용서하신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은 의롭다(정의롭다)고 말한다.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뜻은 선하므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따라 행하면 의로우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행악자를 용서하시는 것은 자신의 선한 뜻을 따라 행하시는 것이므로 정의라고 주장했다. 하나님께서 행악자를 용서하시는 것은 그 행악자에게는 불의(injustice)일지 모르나 하나님에게는 정의라고 주장했다.
– 그러나 하나님이 행악자들을 용서하시는 것이 그들에게 불의하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는 것이 어떻게 그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의하게 대하시는 것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 그리고 안셀무스의 이론은 인간의 용서에는 적용할 수 없다. 용서가 행악자를 처벌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행악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이 정의를 어기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서로 용서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ㅇ 용서란 무엇인가
– 용서는 부당대우를 받은 것 즉 권리가 침해당한 것, 불의가 저질러진 것을 전제한다. 또 용서를 하는 사람이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을 전제한다.
– 나는 A가 나에게 행한 부당한 일에 대해서 A를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용서할 수 있다. 1) A가 나를 부당하게 대했다; 2) 나는 그 행위에 대해 그가 비난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3) 나는 그 행위와 그 행위자가 계속 생각나고 그 행위를 계속 정죄하고 있다; 4) 나는 그 행위에 대해 분함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5) 나는 그 행위를 저지른 A에 대해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 2)에 대해: A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비난 받을 수 없다면, 나는 그를 비난하지 않고 봐 준다(excuse). 3)에 대해: 잊음은 용서와 다르다. 잊으면 용서할 수 없다. 4), 5)에 대해: 내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용서라는 진지한 행위가 일어날 수 없다. “나는 저런 쓰레기같은 인간이 하는 짓은 전혀 신경이 안 쓰여.”라고 말하는 사람이 용서를 할 필요를 느낄까?
– 용서는 가해자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버릴 것을 요구하지만, 그가 저지른 악에 대해서까지 부정적 감정을 버릴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 용서는 가해자가 저지른 일을 더 이상 그에게 돌리지(hold against) 않는, 피해자의 행동을 수반하는 결심이다. 용서하려고 결심했다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다.
– 용서의 결심과 행동은 부분적일 수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범위가 확장될 수 있다. 용서는 종종 단번에 일어나는 행위라기보다 과정을 거치는 점진적 행위이다.
– 용서는 가해행위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 행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그 행위를 가해자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다.
– 용서는 가해행위가 가해자의 개인 이력(履歷)에는 있지만 도덕 이력에는 없는 것처럼 가해자를 대하겠다는 결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A가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무지(non-culpable ignorance)에서 나에게 부당한 행위를 했다면 나는 A를 비난하지 않고 봐 준다. 이것은 그 행위를 A의 개인 이력에는 넣되 도덕 이력에는 넣지 않는 것이다. 용서는 이와 비슷하다.

ㅇ 회개에 따른 용서
– 가해자가 저지른 일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참된 진정성을 가지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나에게 잘못을 빈다면, 그는 자신을 자신이 저지른 일에서 도덕적으로 멀리해서 그 행위를 정죄하는 일에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 그의 현재의 도덕 상태는 회개 전과 완전히 다르다. 현재의 그는 나를 부당하게 대했던 때의 그와 도덕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그의 행위를 더 이상 그에게 돌리지 않는 이유이다.

ㅇ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악행을 그에게 돌리지 않는 것 즉 그 행위를 문제삼지 않는 것은 용서에 있어야 할 도덕적 진지함이 결여된 것이다. 그것은 심각한 행위에 대한 경시(輕視)지 용서가 아니다.
–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비하하는 것이다. 그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내가 그를 용서한다고 하면 그는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나의 가치에 맞게 대하지 않는 것이다.
– 예수님은 신약 어디에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셨지 용서하라고는 하시지 않았다.
– 심리치유파들은 이 점에서 철학적 신학적 저자들이 생각하는 용서와 다른 개념의 용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용서를 전적으로 피해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사회적(a-social) 무도덕적(a-moral) 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가해자의 태도와는 관계없이 피해자가 그 가해행위와 가해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도록 도우며, 피해자에게서 마침내 그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면 그가 용서를 했다고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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