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마 5:9

2015년 9월 27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목사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이 7복은 3복의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하게 되면 또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대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화평은 양보를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세상에 분란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사람들간에 갈등이 많습니까? 또 왜 그렇게 나라간에 분쟁이 많습니까? 각자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기려들기 때문 아닙니까? 다 자기가 그만큼은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 즉 온유한 사람이 아니면 화평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1

그러면 ‘화평’은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보통 화평이라고 하면 싸움과 갈등이 없는 상태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화평(평화, 평강 등)의 원어인 ‘샬롬’은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샬롬은 어떤 공동체가 있을 때 그 공동체가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 서로 갈라지지 않은 하나의 상태를 의미합니다.2 그래서 구성원이 각자가 그리고 서로 잘 지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3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과 피조계는 이런 샬롬의 상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느 하나 훼손되지 않고 어디 하나 서로 갈라지지 않은 온전한 상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면서 이 샬롬의 상태가 깨졌습니다. 피조계 전체 그리고 피조물들 각자는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이 훼손되고, 하나님과 피조계 그리고 피조물들 사이는 불신과 미움으로 서로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깨진 샬롬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회복하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아담의 범죄와 그에 따른 모든 피조물들의 범죄로 인해 모두가 훼손되고 모든 관계가 깨졌었는데 그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샬롬이 회복된 것입니다. 이런 샬롬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들간의 관계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관계에서 화목관계로 회복되면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되고 나아가서 사람들을 서로 화목하게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이 온전해지고 다른 모든 관계가 온전해진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런 온전함을 누리도록 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샬롬을 이루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살펴 보고 있는 산상수훈에서 그 뜻을 친히 밝히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4-45).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성품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면 악인에게도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닮게 됨으로써 그 분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지어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만물을 화목케 하신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어떤 상황을 배경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되고 누가 그렇게 되지 못할까요? 이것을 알려면 예전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를 뿌리부터 살펴 봐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누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렸는지를 살펴 봐야 합니다. 창세기 6장 2절과 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는 경견한 계열을 가리킵니다. 즉 경건한 아벨이 죽은 후 그 계보를 잇게 된 셋 계열입니다.

한편 ‘사람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경건한 계열을 가리킵니다. 즉 경건한 아벨을 시기해서 죽인 가인 계열입니다. 가인 계열은 폭력과 싸움을 좋아하는 계열이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고 그 후손인 라멕은 사람을 죽이고는 뻔뻔스럽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배이리로다.”(창4:23-24). 또 타락한 경건한 계열이 불경건한 계열과 결혼해서 불경건한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싸움을 좋아하고 전투에 능숙한 사람들이라 고대에 유명한 용사들이 되었습니다(창6:4).

한편 불경건한 계열은 나중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시고 이들과 대비되는 계열을 세우시기 위해서 부르신 게 아브라합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에게서 이스라엘 민족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이시기 전에 즉 그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나라를 세우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앞으로 지키도록 주신 명령 중에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그(왕)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신17:16). 병마는 전쟁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왕에게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은 전쟁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은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대관식 때 말이 아니라 노새를 탄 사실에서도 드러납니다.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에 태우고 인도하여 기혼으로 가서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에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왕상1:38-39). 말과 나귀의 혼혈인 노새는 전쟁용이 아닙니다. 말처럼 크고 빠르지가 않아서 전쟁용으로는 쓸 수 없고 다만 힘이 좋고 끈기가 있어서 짐 나르는 용으만 쓰입니다. 말하자면 노새는 전쟁용이 아니라 평화용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왕이 대관식 때 노새를 탔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유지해가는 나라가 아니라 평화로 이루어가는 나라 그리고 평화를 촉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함을 의미했다고 봐야 합니다. 영원한 이스라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신 사실은 이 원칙을 확증해 줍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마21:6-7). 결국 이스라엘에 주어진 사명은 세상에 평화(샬롬)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도 ‘평강(샬롬)의 왕’이었습니다(사9:6).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특히 율법준수에 온 힘을 기울였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샬롬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샬롬을 만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샬롬을 이루는 수단으로 무력을 쓰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당연히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는 평화로운 세상, 샬롬이 넘치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먼저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사람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와서 율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평화로운 세상, 샬롬이 넘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사2:2-4 참고).4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이 회복되려면 자신들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에게서 해방되어야 할텐데, 그들은 이 일을 메시아가 나타나서 로마를 힘으로 물리침으로써 이루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과격분자들인 열심당원들뿐만 아니라 그 당시 분파 중 수가 가장 많고 영향력이 가장 컸던 바리새인들도 기회만 되면 언제든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메시아만 나타나면 칼을 들고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력으로 샬롬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37편은 그렇게 분노를 발하는 사람이 샬롬을 이루는 게 아니고 온유한 사람들이 샬롬을 이룰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37:7-8, 11). 샬롬은 무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무력을 사용하면 반드시 당한 쪽에 앙금과 미움을 남깁니다. “지금은 내가 힘이 없어 당했지만 언젠가 내가 힘이 생기면 이 원수를 반드시 갚아 주마” 하고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샬롬은 항상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가 손해 보는 자기희생과, 하나님께서 악을 처리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온유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에 샬롬을 이루기 위해서 온유함과 자기희생을 실천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을 죽이려 드는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참아내고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샬롬)하고자 했습니다(히12:14).5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마5:44-45). 그러나 무력으로 샬롬을 추구했던 유대인들은 기원 후 60년대 말에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70년에 철저하게 멸망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은 자신의 아들들이 아니라고 공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샬롬은 오직 온유함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샬롬이 풍성하게 피어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희생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가 우세한 나라에서는 강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시도가 많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들조차도 신학으로 정죄하고 법으로 윽박지르며 무력으로 진압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시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못하실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귀한 존재로 대접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고귀하게 대접하시는 사람들을 하등한 존재로 대하지 맙시다. 평강(샬롬)의 왕께서 하신 것처럼 온유함과 자기희생을 통해서 샬롬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시다.

1전에 살펴 본대로 3복의 온유함은 이런 개인적인 온유함보다 범위가 넓다. 이런 더 넓은 의미의 온유함과 화평하게 함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하에서 설명된다.

2영어로는 wholeness라고 함.

3영어로는 well-being이라고 함.

4“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들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5“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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