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1

본문: 마 5:10-12

2015년 10월 4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목사

 

자 이제 팔복 중 마지막 복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 이 복은 끝이 1복과 똑같습니다.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이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팔복이 결국은 모두 천국백성의 자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자질 말고 천국에서 살면서 나타내야 하는 자질 말입니다. 팔복은 이미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니까요. 한편 본문의 8복은 4복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당연히 의를 추구하게 되고 그런 사람은 박해를 받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본문이 말하는 의는 어떤 의일까요?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본문의 의를 종교적 의로 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하는 박해는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종교적인 일을 하다가 받는 박해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는 경우입니다. 사람들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11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가리키는 사람들은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또는 기독교 관련 일을 열심히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 말미암아’가 꼭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만을 가리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꼭 기독교 티를 안 내더라도 예수님처럼 살다가 박해받는 경우도 포함하는 것이 기독교의 포괄성에 더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일반적 해석은 본문의 의를 개인적 의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 의롭게 살다보니 거룩한 성품이 드러나고 그게 세상의 악과 구별되니 세상이 박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거룩한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거룩하게 되었고 그 거룩함이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이 이질성 때문에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이 자신들의 양심을 찔러서 불편하게 하니 그들을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요15:19). 실제로 이런 동기로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요일3:12).그리고 성경에서 박해를 받은 사람들을 더 살펴 보면 이렇게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도 의롭게 살아서 사울에게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다니엘도 의롭게 살아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두번째 해석은 첫번째 해석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단지 종교적 차원뿐만 아니라 신자의 삶까지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복에서 이미 살펴 보았듯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회적 차원까지도 포괄합니다. 개인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개인의 삶 중에 사회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영역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의에는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사회의 의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런 의는 참으로 이상한 의입니다. 그런 사람은 의에 대한 개념이 굉장히 잘못 돼 있거나 아니면 위선적인 사람입니다. 사회에서 불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심히 유감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종교적 개인적인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사회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종교적 개인적 의가 사회적 의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은 알지만 사회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 종교적 개인적 영역에만 몰두하면서 그것을 의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의는 반드시 개인에서 출발해서 사회까지 나아갑니다. 자신 안에 의로운 성품이 생기면 사회에서 자행되는 불의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의를 종교적 개인적 의(righteousness)에 한정시켜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의 즉 정의(justice)까지도 포함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의를 추구하면 박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교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의를 추구할 때도 박해를 받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박해를 받는 것은 정의를 추구할 때입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잘 지적한 대로 일반적으로 의로운(righteous) 사람은 숭배나 무시의 대상이 되지 박해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박해를 받는 사람은 정의(justice)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2 저는(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실제로 그 말이 옳음을 입증해 주는 사례를 많이 봐왔습니다. 종교적 의나 개인적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정말 칭찬의 대상이거나 무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선을 행하고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 즉 개인적 의를 가진 사람은 칭찬의 대상이었습니다. 부족한 시간 내서 어디 가서 봉사활동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데 어떻게 칭찬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편, 열심히 종교생활하는 사람 즉 종교적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무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종교생활 열심히 하는 거야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데 뭐하러 관심을 가집니까? 그냥 무시하면 될 일이지요. 정말 박해를 받는 사람은 조직이든 사회든 불의한 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바꾸려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불의한 체제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고 박해를 하는 것이지요.3

의와 박해에 대한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우리나라와 남미에서 많이 봐 왔습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도 독재국가였고 남미도 대부분이 독재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사회에 온갖 불의가 횡행했습니다. 권력자는 약자를 압제하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착취했습니다. 그런 불의를 감시하고 교정해야 할 경찰기관도 사법기관도 다 그들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보수적인 목사들이 남미에서는 보수적인 신부들이 이런 사회불의를 보고도 침묵했습니다.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면 용공이니 빨갱이니 하면서 오히려 정죄했습니다. 특권층에게 착취당하는 브라질 사람들의 비참함을 보고 사회정의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했던 까마라 대주교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 부른다. 그러나 내가 가난한 이들은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똑같은 현상이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한국 보수교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사역을 하면 낮아지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칭송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가난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용공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이게 한국 보수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팔복에서 말하는 의는 사회정의가 아니라면서 사회의 불의에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소위 ‘종교적 개인적 의’만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의를 추구해서 우리가 여기 8복에서 말하는 대로 박해를 받았습니까? 누가 우리를 박해했겠습니까?

독재자들은 개인적 종교적 의를 말하는 종교인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게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구조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데 왜 두려워합니까? 또 그들은 미래에 의가 이루어질 것이니 현재의 불의를 참고 견디라는 가르침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종교인들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은 피지배층이 들고 일어나지 않고 현재의 억압을 그냥 참고 견디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독재권력과 보수 성직자들은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합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에서 역대 군부독재정권이 보수교회 목사들을 박해했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그들이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막역하게 잘 지내면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줬다는 얘기만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굉장히 현실참여를 안 하는, 사적 영역에 머무는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원래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신앙이 내면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높은 하늘에 떠서 세상 일에는 관여치 않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좋은 신인지만 자랑하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는 역사 가운데 개입해서 행동하심으로써 자신의 성품을 실현하는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압제를 받으면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자 그에 응해서 그들을 구원해내심으로써 자신의 긍휼함을 실현하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포도원을 뺏기 위해서 나봇을 죽인 아합과 이세벨을 심판하심으로써 자신의 정의로움을 실현하셨습니다. 우리가 개인적 의를 추구해서 의로운 성품을 계발하면서도 그 의로움을 사회에 실현하지 않고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성경을 읽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회의 불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하고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사회는 불의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박해를 받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다음 경고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6).

1우리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오늘 본문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이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들과 다른 한글 성경들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이라고 되어 있어서 시제가 서로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어느 쪽이 옳은 번역일까? 해당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완료인데, 헬라어에서 완료시제는 어떤 일이 과거에 일어나고 완료되었지만 그 일의 효과가 화자의 시점에까지 미치고 있을 때 사용한다. 본문을 번역할 때 개역개정판은 박해가 과거에 일어났음을 강조하고 다른 역본들은 과거에 일어난 박해가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완료시제를 사용하셨는가? 천국 백성들의 자질을 말씀하고 계시니 현재시제를 사용하셨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하여 김성수 교수는 이것은 한 개인이 핍박 받아 온 역사보다 창세 때부터 그 때까지 또 앞으로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 가운데서 받을 핍박의 역사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본다. 김성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3), 165-166. 아무튼, 완료시제가 쓰였으니, 본문이 의미하는 것은 과거에 박해를 받았고 현재는 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과거에 받은 박해가 현재까지도 그 영향을 미치는 상태 즉 현재에도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다.

2Nicholas Wolterstorff, Justice: Rights and Wrong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p. 111.

3물론 사회정의를 추구하지 않아도 기독교를 믿는 것만으로 박해를 받는 경우가 있다. 이슬람국가나 공산주의국가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들이 믿는 기독교가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할 잠재적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박해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조용히 종교적 개인적 의만 추구하면 그들을 왜 박해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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