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2

본문: 마 5:10-12

2015년 10월 18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목사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듯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의의 추구는 적극 환영하면서 정의 추구는 기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한사코 본문이 말하는 의는 사회정의와는 관계없는 의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12절은 그들의 그런 견해가 잘못됐음을 보여줍니다. 이 절은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은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문맥상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11-12절을 10절에서 따로 떼어서 아홉번째 복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11-12절은 문장 구조가 앞의 여덟 복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아홉번째 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냥 여덟번째 복인 10절을 부연설명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12절에서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10절에서 말한 박해와 같은 종류의 박해를 가리키고, 따라서 그들이 받은 박해는 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받은 박해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지자들이 추구한 의는 무엇이었을까요? 무슨 의를 추구했길래 박해를 받았을까요?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잘 연구하거나 아니면 그런 문제들을 잘 연구한 신학자들의 글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 마태복음 21장 33-40절에는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다른 나라에 갔는데 시간이 흘러서 열매를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더니 그 농부들이 종들을 심하게 때리거나 죽였습니다. 다시 종들을 더 많이 보냈더니 마찬가지로 심하게 때리거나 죽였습니다. 마침내 설마 자신의 아들한테는 그렇게 안 하겠지 하고 아들을 보냈더니 그 농부들은 그 아들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농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그 지도자들을, 종들은 선지자들을,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원하신 열매가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열매를 받으라고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셨을까요? 어떤 열매를 받으려 했기에 선지자들은 죽기까지 박해를 받았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이 비유만 보면 알 수 없지만 그 배경이 무엇인지를 알면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사실 예수님께서 이사야 5장 1-7절 내용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곳에도 똑같이 포도원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포도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하면서 이스라엘의 기름진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좋은 열매는 커녕 들포도만 맺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은 포도 대신 들포도를 맺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이 들포도를 맺은 것을 책망하고 좋은 포도를 맺으라고 촉구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좋은 포도는 무엇을 상징하고 들포도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좋은 포도는 정의와 의를 상징하고 들포도는 포학과 부르짖음을 상징합니다. 7절에서 “그들에게 정의(미쉬파트)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미스파)이요 의(체다카)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체아카)이었도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서 원하신 열매, 선지자들을 보내서 받으려고 하신 열매는 정의와 의였습니다.2 선지자들이 정의와 의를 이루라고 촉구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 10절에 나오는 박해를 초래하는 ‘의(디카이오수네)’에 대응하는 히브리어는 이사야 본문의 ‘미쉬파트(정의)’와 ‘체다카(의)’ 중 ‘체다카’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단어는 정의와 별도의 단어이니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체다카는 미쉬파트와 한 쌍으로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두 단어가 뉘앙스는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개념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3 의와 정의가 결국은 같은 개념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본문 7절에서 ‘부르짖음’이 의의 대응어로 나오는데 이것은 압제당하는 사람들이 고통 때문에 울부짖는 것을 가리킵니다.4 그러니까 의는 사람들이 압제당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의의 추구는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그 압제에서 구원해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정의 즉 사회정의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실 정의와 의는 서로 분리해서는 안 되는 개념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의를 하나님을 잘 믿고 죄를 짓지 않는 것 즉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의는 정의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둘은 동일한 개념입니다. 정의란 무엇입니까? 각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모든 사람은 자신의 가치에 맞게 대접 받을 권리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컨대, 고용자는 일한 가치만큼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고 고용주는 그 임금을 지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러한 권리와 의무가 제대로 행사되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세상원리상 약자는 늘 자신의 몫을 빼앗기고 권리를 침해당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의를 말할 때는 보통 약자가 압제와 착취에서 벗어나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율법의 모든 내용은 모든 존재(하나님과 피조물)를 그 가치에 맞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어떤 가치가 있어서 그 가치에 따라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고 다른 존재는 그렇게 대접할 의무가 있으니 그 의무를 행하라는 것이 율법의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1계명은 유일신이신 하나님은 그 가치에 맞게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 그에 따라 그 분을 대접하라는 것이고,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9계명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가치 때문에 거짓말로 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니 그에 따라 그들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비인격적인 존재한테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밭 가는 소한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계명은 밭 갈면서 고생하는 소는 그 수고의 가치 때문에 일하는 중에 풀을 뜯어먹을 권리가 있으니 그에 따라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율법은 모든 존재에게 그에 마땅한 몫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의의 개념과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정의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데 그 이유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의를 위해 박해를 받아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은 누구였고 못 들어갈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당시에 유대 지도층들의 주요 분파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중 사두개인들은 로마와 결탁해서 권세를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집단들로서 성전을 장악한 채 온갖 불의를 저질러 권력과 부를 취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당시의 불의한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위해 싸울 필요가 없었고 그에 따라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일도 없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이방제국인 로마가 자기들을 지배하는 것과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 등에는 분노했지만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의에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과부의 재산을 삼키고(눅20:46-47) 정의를 버림으로써(마23:23)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역시 약자의 권리를 위해서 힘 있는 자들과 싸우지는 않았던 것이고 따라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일도 없었습니다.

한편 당시에 부자들도 불의를 자행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들을 다음과 같이 책망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약5:1-6).

그래서 이렇게 정의를 버리고 약자를 착취했던 사람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부자들은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천국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정의를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 분은 만물을 가지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셨습니다.5 그리고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 과부들, 어린이들 등의 약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사람들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를 때 마시게 하고 헐벗었을 때에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보라고 하셨습니다(마25:31-46). 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박해를 받으셨는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일은 주로 병 든 사람을 낫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비판하셔서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늘 정의를 위해 사시다가 박해를 받으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정의를 행하시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탄생에 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한 말이 이를 말해 줍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1:52-53). 이렇게 정의를 추구하며 사신 예수님께서는 결국 박해 끝에 죽임을 당하셨지만 종국에는 부활승천하셔서 천국의 왕이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른 그리스도인들도 약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낮아지신 그리스도, 약한 자를 섬기시는 그리스도, 정의를 이루시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다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환란과 예루살렘 멸망 때 심판 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정의를 위해 싸움으로써 박해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회의 불의를 외면한 채 그냥 왜곡되고 축소된 의를 따라 살면서 누구에게도 박해를 받지 않는 평안한 종교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1여기서 성경저자는 뜻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말놀음을 하고 있다. 즉 발음이 비슷한 미쉬파트와 미스파를 대조시키고 체다카와 체아카를 대조시키고 있다.

2이 사실은 한국의 일반적인 기독교인의 통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의를 중시하시는지 보여 준다. 한 사회가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정의인 것이다.

3구약신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미쉬파트는 어떤 상황을 체다카의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취해야 하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Christopher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VP, 2004), 257.말하자면 미쉬파트는 체다카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즉 미쉬파트는 수단의(手段義), 체다카는 목적의(目的義)라고 할 수 있다.

4צְעָקָה (체아카)는 성경에서 압제당하는 사람들이 고통 때문에 부르짖는 것을 표현할 때 쓰이는 특화된 표현이다. Christopher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VP, 2004), 259. 즉 이것은 정의를 위한 부르짖음이다.

5누가복음 2장 22-23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제물인 비둘기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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