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금과 빛

[본문: 마 5:13-16]

 

대부분의 성경은 오늘 본문을 팔복 구절인 1-12절과 따로 분리해 놓습니다. 소제목도 따로 있어서 개역개정판의 경우 팔복 구절은 ‘복이 있는 사람,’ 오늘 본문은 ‘소금이요 빛이라’라고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앞의 11-12절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3-10절에서는 ‘그들’이라는 3인칭을 써서 천국 백성의 자질에 대해서 설명하시다가, 11절부터는 ‘너희’라는 2인칭을 쓰면서 초점을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옮기시고 이것을 산상수훈 끝까지 유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11-12절은 오늘 본문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두 구절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기 전에 천국이 곧 올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4:17, 23). 그리고 이어서 그 천국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 어떤 자질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를 팔복을 통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와 더불어 이 자질들 중 대표격인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박해를 받더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었고 두번째는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그같이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 이유는 그 뜻이 무엇이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내용이 뜻하는 것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가치가 선지자들과 비교될 만한 사람들이라고 암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선지자들이 한 일과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들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어겨서 죄를 범하면 그들을 책망해서 부패하지 못하도록 했고, 또 그들이 죄악의 어둠 속에서 헤맬 때 영광스러운 이상(理想)을 제시해서 그들이 그것을 소망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선지자들의 이런 역할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제자들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칭대명사를 적절하게 사용하셔셔 오늘 본문을 앞의 11-12절과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어떻게 선지자들의 역할과 닮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먼저 소금 비유를 통해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이 부패하지 않게 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이 부패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싱거워서 별 맛이 없는 음식에 맛을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이 부패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둘 중 오늘 본문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역할은 두번째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맥락에서 무미건조한 세상을 더 맛깔스럽게 만드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핵심 역할이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다가, 설사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도 소금의 그런 역할은 어느 정도는 두번째 비유인 빛의 역할과 중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옛날 우리 식문화를 보면 냉장고나 냉동고가 없을 때에는 소금이 부패방지 역할을 했습니다. 썩지 않도록 고기도 소금에 절이고 반찬도 짜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식품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소금을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고기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소금을 고기에 문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소금이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소금에는 짠 성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이 짠 맛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소금이 가치가 있을까요? 당시에 사해에서 나는 소금은 불순물이 너무 많이 섞여 있어서, 짠 맛을 지닌 진짜 소금이 녹아 없어지고 짠 맛을 지니지 않는 가짜 소금만 남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1 이 가짜 소금은 그야말로 천덕꾸러기였습니다. 다른 물품들은 본래의 기능을 잃어 버려도 다른 용도로도 쓰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목재로 쓰려던 나무가 부러지면 목재로는 못 써도 땔감으로는 쓸 수 있었고, 꽃은 꽃잎이 떨어져서 아름다움이 사라져도 거름으로라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짠 맛을 잃어 버린 소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에 버려저서 사람들 발에 밟히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팔복에서 말한 그런 특성들을 잃어 버리면 세상을 위해서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역할이 청결과 의를 지니고 세상의 부패를 막는 것인데 그것들이 없어서 세상의 부패를 전혀 막을 수가 없으니 그 존재가치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쓸모없이 버려지는 수밖에요.

두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빛의 비유를 들어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 이상을 제시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이상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빛의 특성이 여러 가지가 나와 있는데 그 중에서 본문과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빛은 사물을 잘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두운 데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빛이 비치면 훤하게 드러납니다. 둘째, 빛은 영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샹들리에가 아름답고 보석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들이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특성을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적용하면 첫째, 빛은 감추어져 있던 죄악을 드러나게 하고 둘째, 빛은 영광의 광채를 내뿜어서 사람들이 흠모하게 합니다. 이 둘 중 오늘 본문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역할을 염두에 두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16절에서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의 죄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시고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을 보고 탄복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팔복 등의 자질이 만들어내는 영광을 세상에 내뿜음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그에 탄복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영광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을 이렇게 우리에게 적용하기 전에 먼저 당시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들은 당사자는 우리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거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도 먼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14절의 ‘산 위에 있는 동네(폴리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동네’라고 번역된 단어 ‘폴리스’는 더 규모가 큰 주거지 즉 성읍이나 도시도 가리킵니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때 예루살렘을 염두에 두셨다고 생각하는데 저도 기꺼이 동의합니다.2

예루살렘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예루살렘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읍 예루살렘이 하는 일은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을 여호와라는 유일신이 이집트에서 구해내고 그 어디에도 없는 탁월한 율법을 주어서 영광스러운 나라를 이루어 살게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디 한번 잘 사나 보자’ 하고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도를 하필 높은 지역인 예루살렘에 두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 높은 위치는 예루살렘을 모든 이방 나라들이 지켜보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그 빛이 이방 나라들로부터 숨겨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선포한 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사62:1-2).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을 예언한 것인데, 흥미롭게도 예루살렘 즉 이스라엘에 원래 주어졌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의를 실천해서 이방 나라들이 그 영광을 보게 할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과 다를 바 없이, 어떤 때는 더 심하게 불의를 행함으로써 이 사명에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기뻐하시는 한 종을 택하셔서 그가 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를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42:1, 6). 여기서 말하는 종은, 이 구절을 인용한 마태복음 12장 17-21절이 잘 보여 주듯이 예수님입니다. 이스라엘은 의와 정의를 실천하지 않아서 이방의 빛이 되라는 사명에 실패했지만 새 이스라엘이신 예수님께서는 의와 정의를 행함으로써 이방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실 것이었습니다.

한편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도 주 안에서 빛이라고 말합니다(엡5:8).3 예수님의 본문 말씀을 듣고 있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도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방의 빛으로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의와 정의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이방인들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게 할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과거의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 참된 이방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시는 나라가 올 것이고 그들은 그 나라의 백성들이니, 이스라엘이 실패한 임무를 완수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 교회 상황을 볼 때 성경 말씀 중에 오늘 본문만큼 마음이 찔리게 하는 구절도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찬탄을 이끌어내기는 커녕 세상과 다름없이 부패했습니다. 세상처럼 돈에 눈이 멀고 세상처럼 권력에 빠져서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에 대한 관심은 버린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세상의 빛으로서 행해야 할 의와 정의는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아무 쓸모가 없어져서 밖에 버려져 짓밟히듯이, 의와 정의를 잃어버린 교회는 아무 쓸모가 없어져서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높은 데 우뚝 서서 세상을 인도하는 빛이 되어야 할 교회는 아무런 빛도 내지 못하는, 그래서 사회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있으나마나한 종교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되새겨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는 “아니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다를 수가 있지? 저 사람들의 저 고귀한 순결과 빛나는 의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어떻게 저 사람들이 만드는 공동체는 저렇게 아름답고 정의로울 수가 있지?”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에게 빛을 주셔서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소개할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셨던 그 오래된 임무, 그들의 죄성으로 인해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그 임무,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다시 한번 우리 새 이스라엘에게 기회가 주어진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눈이 모든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1Craig S. Keener, The Gospel of Matthew (Eerdmans, 2009), 173.

2Tom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1 (SPCK, 2002), 40.

3“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2015년 4월 26일|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한재일 목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