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마 5:8

2015년 9월 20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목사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이 6복은 2복의 결과입니다. 즉 마음이 청결한 것은 애통해하는 것의 결과입니다. 이 두 복이 어떻게 이렇게 연결되는지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참으로 애통해하게 되면 자신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고 진력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데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진정으로 애통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한편 전에 애통의 대상은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사회의 죄악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었는데 그러면 사회의 죄악에 대한 애통은 마음이 청결한 것과 어떻게 연결이 될까요? 언뜻 보면 서로 연결이 안 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뒤에서 살펴 보겠지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단지 마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청결하게 행동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1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두 복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사회의 죄악에 대해 애통해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청결하고 깨끗하게 행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는 보통 ‘청결하다’ 그러면 ‘깨끗한 상태,’ ‘티, 흠, 더러움 등이 없는 상태’ 등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염두에 두신 뜻은 그것보다 범위가 넓습니다. 6복은 시편 24편 3-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2 따라서 그 시편을 잘 살펴보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여기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 것이 손이 깨끗한 것, 뜻을 허탄한(거짓된) 데에 두지 않는 것,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것 등과 같이 나오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용법상 서로 다른 독립적인 내용을 열거했다기보다 같은 내용을 조금씩 표현을 바꿔서 열거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3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한 것은 손 깨끗한 것, 뜻을 거짓된 데에 두지 않는 것,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청결한 것은 마음이 깨끗한 것뿐만 아니라 행동도 깨끗하며(손이 깨끗함)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며(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않음) 마음과 말이 일치하는(거짓으로 맹세하지 않음) 것을 포함한다고 봐야 합니다.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복이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육안으로 사람을 보듯이 하나님을 본다는 말일까요? 이에 대하여 우리는 또 다시 시편 24편의 도움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 대해서 6절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3절에서는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여호와의 거룩한 곳에 선다고 말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6복이 말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곳 즉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뜻한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결국 6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복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 즉 거짓을 추구하고 거짓되게 행동하는 사람이 거룩하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 이제 예수님께서 이 6복을 말씀하신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계셨을까요? 마음이 청결해서 하나님을 볼 사람들은 누구였고 못 볼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예수님께서는 6복을 말씀하실 때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내용이 시편 24편에서 말하는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내용과 일치합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옳은 말은 하지만 그 말을 행하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자신들이 가르친 옳은 행위는 하지 않으면서 나쁜 행위는 하는 행태를 지적하시는 것이므로 곧 시편 24편의 손이 깨끗하지 않은 것과 상응합니다. 또 마태복음 23장 25-28절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경건한 척 깨끗한 척하지만 마음은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시편 24편의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것과 상응합니다.

또 마태복음 23장 5-7절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사람에게 보여서 자기의 영광을 얻으려고 경건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자기영광이라는 허탄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시편 24편의 뜻을 허탄한 데 두는 것과 상응합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23장 16-22절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성전이나 제단으로 맹세하고는 안 지키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거짓으로 맹세하는 것이므로 시편 24편의 거짓으로 맹세하는 것과 상응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6복에서 마음의 청결을 말씀하실 때 염두에 두었던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시편 24편 6절이 암시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조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습니다(창3:8).5 그리고 그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쫓겨 났습니다. 그 때 이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분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목표가 되었습니다(시24:6; 27:4).6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그 죄책과 죄성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사람이 없었습니다(출33:20; 사6:5).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라는 소망을 늘 가지고 살았습니다(시11:7; 17:15).8

율법 연구와 준수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당연히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과는 달리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사람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들로서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청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그러나 물리적으로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분류되었으니까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성령님께서 계신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성령님의 계시가 없으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오순절 때 성령님을 받음으로써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 분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풍성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온 인류의 소망이었던 그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전이 파괴되면서 기존에 주어졌던 하나님을 만나는 수단마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말한 것처럼 아직은 흐릿하게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그러나 우리의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그 때는 모든 흐릿한 것이 걷히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계22:3-4). 그 때에는 다윗이 간절히 구했던 그 소망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27:4).

그러니 청결한 마음과 깨끗한 손을 가지는 데 전력을 다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보기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그 더러워진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우리도 여전히 마음이 더러운 채로 있다면 나중에 하나님을 뵙게 될 때 그 얼굴을 피해서 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는 것에 공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더러운 마음을 지닌 채 그 영광을 접하고 살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15복의 인용처인 시편 24편에서는 ‘손이 깨끗하다’고 표현한다.

2시편 24편 3-6절에는 ‘마음의 청결,’ ‘복 받음,’ ‘하나님을 봄’ 등 6복의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다.

3특히 시편, 잠언 등의 히브리 시가서에는 같은 내용을 표현만 약간 바꿔서 두세번 반복하는 구절들이 많다.

4따라서 마음이 청결한 것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라기보다는 우리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5-8복이 우리의 마음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5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6“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27:4).

7“또 이르시되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5).

8“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다”(시11:7).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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