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마 5:7

2015년 9월 13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목사

 

이제 8복의 전반부를 마치고 후반부를 살펴 보게 되었습니다.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전반부인 1-4복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 상태와 태도에 대한 내용이고 후반부인 5-8복은 그 상태와 태도에 따라 나타나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1-4복의 각 상태와 태도는 5-8복의 각 행위에 대응합니다. 즉 1복의 결과 5복이 나타나고 2복의 결과 6복이 나타나는 식입니다.1 그러면 1복과 5복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게 될까요? 그 인과관계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스럽게 곤경에 놓인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자신이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절감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신학자는 은혜와 비교함으로써 긍휼의 뜻을 훌륭하게 설명했습니다.2 은혜는 죄와 그로 인한 죄책에 대한 것인 반면, 긍휼은 죄로 인한 고통, 비참, 곤경 등에 관한 것이라는 겁니다. 즉 긍휼히 여기는 것은 죄로 인해 곤란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 사람들이 그 곤경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런 사람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을 우리가 처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을 때 우리가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권리를 모두 행사해서 그 사람을 법과 규칙대로 처벌하느냐 아니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관대하게 대하느냐를 보면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곤경에 놓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비참한 처지에 놓였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법대로 처리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자녀로서 자신의 긍휼함을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반역해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그 죄에 따라 심판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심지어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마저도 주위 사람들의 살해 위협에서 보호하셔서 생명이 보존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죄로 인한 저주로 곤경에 빠진 인류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우리가 긍휼을 행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긍휼을 행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처벌할 권리가 있으므로 아무런 자비 없이 그들을 법대로 처벌해도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에게도 자신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처벌할 권리가 있으므로 법대로 우리들을 처벌하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긍휼함 없이 처벌하면 하나님께서도 자신에게 죄 지은 우리들을 긍휼함 없이 처벌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긍휼히 대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대하실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사람들이 5복을 볼 때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누차 말씀 드렸듯이 팔복은 무시간적(無時間的)인 윤리를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말씀하실 때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 상황에 적용되는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4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려면 이스라엘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압제 받으며 살다가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긍휼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들을 도와줘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 압제에서 구원을 받을 만한 의로운 일들을 행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집트 땅에서 현지 사람들처럼 우상숭배를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호의를 얻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집트의 압제 밑에서 당하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2:23, ;3:9-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명령하시는 데는 이런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가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학대로 곤경에 처했던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신 사건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존재하게 된 근본 원인이 하나님의 긍휼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자신들의 삶에서 그 긍휼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실천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긍휼을 행하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외지인)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외지인)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출22:21-27).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외지인, 과부, 고아를 학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은 생계수단이 부족해서 가난에 시달리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신26:12)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베푼 하나님의 긍휼을 잊고 과부와 고아와 외지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착취하고 학대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 그들이 네 가운데에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에서 나그네(외지인)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에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 (겔22:6-7)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내가 너를 뭇 나라 가운데에 흩으며 각 나라에 헤치고 너의 더러운 것을 네 가운데에서 멸하리라. 네가 자신 때문에 나라들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22:15-16)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곧 도래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이스라엘과는 다른 영광스러운 나라가 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루어질 새 나라에서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 나라가 영원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나 세상의 기준에서 봤을 때 새로 도래할 나라에 들어 갈 1순위에 속한 사람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기준과 바람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율법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저주했습니다(요7:49). 그리고 죄인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도 그런 사람을 예수님께서 환영하시는 것도 못 마땅해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7:36-39)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멸시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이스라엘이 의로와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광야 생활할 동안 율법을 잘 지켜서 가나안 땅에 들여 보내셨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읽는 성경에는 그들이 의롭거나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성경은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약자들을 경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눅20:47). 이렇게 약자들을 착취하며 긍휼을 베풀지 않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악상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그들이 정의와 긍휼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마23: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죄악들에 대해서 그 세대가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3:35, 36). 이어서 24장에서는 그 세대가 어떻게 심판을 받을 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 즉 유대의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른 무리들은 기원 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멸망 당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철저하게 심판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른 크리스천들은 세리, 창기, 고아, 과부, 이방인 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는데 그들은 심판을 면했습니다. 긍휼히 여긴 사람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요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 나라입니다.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마음을 높게 가지지 말고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깁시다. 이것만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엄중하신 하나님 그러나 약한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2:13).

1전에 살펴 보았듯이 1-4복은 점진적이다. 즉 1복은 2복에, 2복은 3복에, 3복은 4복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5-8복은 점진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1-4복이 점진적이고 5-8복이 1-4복의 결과이므로 5-8복이 점진적인 면이 있기는 있지만 자체 내에서는 특별한 인과관계를 발견하기 어렵다.

2리차드 렌스키(Richard Lenski)의 설명이다. John Stott, The Message of the Sermon on the Mount (IVP, 1985), 47.

3마틴 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의 산상설교집 상 (정경사, 2001), 141.

4 물론 그 내용의 원리를 파악해서 다른 상황들에 2차적으로 적용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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