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임무

본문: 창2:4-25; 3:1-7, 20-24

2011년 3월 13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목사

 

지난 시간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즉 ‘선악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선악을 안다’ 또는 ‘선악을 분별한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차원이 아닌 사법적, 통치적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으로서 세상을 지혜로 다스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약간 바꿔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아담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은 이것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하신 것은 첫째는 동산을 경작하는 것이고 둘째는 동산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 첫번째 것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여기서 ‘경작하다’는 논밭을 갈아서 작물을 키우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더 넓게 봐서 ‘일하다’라는 의미로 보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성경들도 그 단어를 ‘work’로 번역했습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놀도록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동산에 온갖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 있으니까 좀 놀다가 배 고프면 포도 따 먹고 또 놀다가 배 고프면 오렌지 따 먹고 하는 그런 놀고 먹는 삶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일은 우리가 존재하는 데 있어서 또 우리의 존재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황폐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일은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 중의 필수요소입니다. 우리가 가끔씩 꿈같은 삶을 그려 볼 때 일을 안 해도 살 수 있는 상황을 떠 올리는 것은 일 자체의 문제 때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일이 고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 그러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속성 중의 하나인 창조성을 발현하는 수단입니다. 우리는 일을 함으로써 기쁨을 느끼고 성취감을 맛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여전히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일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에덴동산에 먹을 것이 널려 있는데 왜 일이 필요하냐는 거죠. 그리고 주위에 나무들과 예쁜 꽃들과 지저귀는 새들이 많이 있으니 그 상태가 바로 낙원인데 뭘 더 바라냐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에덴 동산이 처음 만들어진 대로 그 곳에서 그냥 영원히 살았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가 돌아갈 곳도 최초의 에덴 동산같은 곳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구속된 세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1장에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 에덴 동산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이룩한 것들로 차있는 문명사회가 나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계21:10-26).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렇게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을 성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창조성을 가지고 자연을 이용하여 문화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화는 아담에게 영광이 될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이용해서 뭔가 가치있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의 영예요 영광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6절이 말하듯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honor)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1 인간이 자신이 만든 것들을 주위에 두르고 있으면 그에게 영광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천군천사들을 주위에 두르고 계실 때 그의 영광이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사6:1-3; 눅2:13-14).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담 즉 인간이 하게 되어 있던 일들과 이것이 그들에게 영광이 됨을 잘 나타내 주는 예가 성경에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이 무엇을 입었는지 아십니까? 출애굽기 28장에 따르면 그는 흰 속옷과 파란 겉옷을 입고 그 위에 흉패를 붙인 에봇을 걸쳤습니다. 그러니까 입은 순서가 안에서 바깥으로 속옷, 겉옷, 에봇, 흉패였습니다. 이 예복은 대제사장에게 영광과 아름다움을 주었습니다.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출28:2). 아담이 자신이 만든 것들을 두르는 것이 그에게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천사들을 두르는 것이 그에게 영광이 되는 것처럼 대제사장도 그 예복을 두르는 것이 자신에게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복의 재료가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줍니다. 그 재료가 인간의 대표인 대제사장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두르게 되어 있었는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흰 속옷은 삼베로 만들어졌고 파란 겉옷과 에봇은 주로 양털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흉패에는 열두 보석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복은 안에서부터 각각 식물, 동물, 광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 식물, 동물, 광물로 만들어진 예복이 인간의 대표인 대제사장을 영화롭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아담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처음에 에덴동산에 살면서 성숙해지도록 훈련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성숙해지면 동산 밖으로 나가서 더 복잡한 일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담에게 에덴동산은 학교고 동산 밖은 일터였습니다. 혹은 에덴동산은 가정이고 밖은 세상이었다고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도 일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아직 미숙한 아담의 수준에 맞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예컨대 과일을 언제 어떻게 따고 어떻게 저장하고 어떻게 먹는지 등등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작업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동산 안에서 또는 동산 밖으로 나가서 보다 어려운 일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양을 키워 양털을 얻어서 옷을 만드는 등의 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에도 익숙해지면 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1절에서는 에덴동산 바깥 세상에 금, 베델리엄, 호마노 등의 광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담은 이런 광물들을 캐서 여러가지 보석들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순서대로 식물, 동물, 광물 순서로 문화를 발전시켰을 것입니다. 그 순서는 앞에서 살펴 본 대로 작업의 난이도 순서입니다. 그리고 그 순서는 인간 문명의 발달 순서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식물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과일을 따고 곡물과 채소를 재배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동물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소를 훈련시켜서 밭을 갈게 하고 말을 훈련시켜서 마차를 끌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은 광물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철과 동을 캐서 기계를 만들고 석유를 뽑아서 그 기계를 가동하고 있습니다. 식물, 동물, 광물의 순서로 인류의 문명이 발달한 것입니다. 한편 이 순서는 영광의 순서이기도 합니다. 식물재료로 만든 삼베 옷보다 동물재료로 만든 비단이 더 영광스럽습니다. 그리고 동물재료로 만든 비단보다 광물재료로 만든 다이아몬드가 더 영광스럽습니다. 인류문명은 점점 더 영광스럽게 발전해가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식물, 동물, 광물로 만든 문명을 두르는 것은 인간의 영광이었습니다. 아담은 그 영광을 누리면서 그 영광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첫번째 임무였습니다.

아담의 두번째 임무는 에덴동산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일부 천사들이 타락했고 그 중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언제라도 창조계를 망칠 태세였습니다. 아담은 이 사탄으로부터 에덴동산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 가득한 곳, 자신에게 기쁨과 영광과 아름다움을 가져다 줄 곳,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충만히 누릴 수 있는 그 곳 에덴동산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런 아담에 맞서 에덴동산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전략은 단순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전략은 에덴동산 안의 몇몇 피조물들을 망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략은 에덴동산의 우두머리인 아담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담의 통치 하에 있는 다른 피조물들은 따라서 무너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쳤을 때 제자들이 다 도망간 것처럼 말입니다.

사탄의 구체적인 전략은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따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자기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지금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따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지금 선악과를 따 먹으면 선악을 분별하게 되어 바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꼬드겼습니다. 지금 바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말처럼 아담에게 선악과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사탄을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세상을 다스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준비가 안 된 왕은 자신을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한번 저지른 잘못은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결정을 존중하여 그를 왕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다스리도록 그를 에덴동산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3:23). 이런 하나님의 결정은 준비가 안 된 아담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초등학생에게 대기업을 경영하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게다가 이제는 땅도 옛날처럼 아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조금만 일해도 많은 산출을 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뼈빠지게 일해야 겨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창3:18-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과 함께 자비도 베푸셨습니다. 아담이 회개를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성경에는 아담이 회개를 했다고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그가 자신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 즉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그가 회개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개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은 동물에서 얻어지므로 이것은 아담을 위해서 동물이 죽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 죽어야 했던 아담을 살리기 위해서 한 생명이 대신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속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담이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타락 전에는 권위와 순종의 질서가 순리를 따랐습니다. 식물은 동물에게 순종하고 동물은 인간에게 순종하고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하고나서는 모든 것이 뒤바뀌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하니 동물도 인간에게 반역하게 되었고 동물이 인간에게 반역하니 식물도 동물에게 반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이제 수많은 반역자들로 둘러싸인 사면초가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적대적인 맹수들이 언제라도 아담을 집어삼킬 태세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가죽옷을 아담에게 입히셨습니다. 아담에게 왕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으르렁거리는 늑대들 앞에 선 가엾은 당나귀에게 호랑이가죽을 씌워 준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덕분에 드센 자연은 그나마 아담에게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 덕분에 인간은 피조계가 완전히 회복되어서 더 이상 인간에게 반역하지 않을 때까지 왕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이 구절의 출처인 이사야 60장을 보면 이 ‘영광과 존귀’가 문화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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