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의 의미

본문: 창3:1-24

2011년 2월 27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목사

 

지난 시간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두 나무의 역할은 우리가 예전에 알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면 주어질 상이 아니라 처음부터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단지 시험용으로서 영원히 금지된 열매가 아니라 한시적으로만 금지된 열매였습니다. 선악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오늘은 선악과가 어떤 의미에서 선물이었는지 즉 ‘선악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이 ‘선악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이것을 도덕적인 의미로 봅니다. 도덕적인 의미에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아담이 원래는 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로 만들어졌는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야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한 금지명령을 내린 사실과 충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셨고 그 명령을 어기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담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면 즉 도덕적 선악개념이 없었다고 한다면 성립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욕하지 말라고 말할 경우 아이들이 우리의 말을 어기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한다면 그에 대해 벌을 줄 수 있습니까? 도덕개념이 없으면 벌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는 야생동물을 한번 생각해 보죠. 늑대 한 마리를 끌어다 놓고 그 앞에다 맛있는 고기를 갖다 놓고는 “기다려!”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늑대가 우리 말을 들은 체도 않고 냅다 그 고기를 먹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늑대를 벌 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늑대는 우리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도 없고 또 그런 개념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도 만약에 늑대처럼 누군가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이 만들어졌다면 아담에게 무엇인가를 금지하고 그것을 어겼을 때 벌을 내린다는 것은 늑대를 벌 주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어긴 아담에게 벌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애초부터 도덕적인 선악개념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선이고 불순종하는 것은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담이 원래는 도덕적인 선악개념이 없었는데 선악과를 먹고 나서야 그 개념이 생겼다는 주장은 틀립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아담이 원래부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도덕적 선악 개념은 있었지만 그것이 약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악을 저지르도록 부추기는 유혹 즉 선악과를 따 먹으라는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선악을 분별하는 의식이 더 강해지도록 하나님의 계획이 짜여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추구함으로써 더욱 선의식을 높이고 그 결과 선악을 분별하는 일에 더 성숙해지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혹이 다가오고 그것을 이길 때마다 우리가 성숙해지는 것은 사실이므로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선악과는 훈련용으로서 영원히 따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선악과 금지가 한시적이었다는 사실과 마찰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창세기 3장 22절 말씀은 아담이 애초에는 선악을 알지 못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야 선악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명칭 자체도 아담이 원래는 선악을 아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것 같습니다.

“아까는 아담이 원래부터 도덕적 선악개념이 있었다고 그러더니 지금은 선악을 알지 못하는 존재였다고 그러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법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방법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선악을 안다’가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고 보면 됩니다. 도덕적 개념이라면 아담이 원래부터 그런 도덕개념이 있었다는 사실에 바로 배치되니까요. 그럼 그것이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선악을 안다’는 표현이 성경 다른 곳에 있으니까요.

먼저 사무엘하 14장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당신의 여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 이 말은 형 암논을 살해하고 도망갔던 압살롬을 다윗이 받아들이게 하려는 요압의 계책에 따라 드고아 여인이 다윗왕에게 한 말입니다. 이 말을 하기 전에 그 여인은 지어낸 자신의 상황을 얘기합니다. 자신은 두 아들을 둔 과부인데 그 아들들이 싸우다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고 이에 사람들이 남은 아들을 살인죄를 물어 죽이려고 하는데 자기 집의 상속자가 끊어지게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다윗왕에게 구하면서 하는 말이 아까 인용한 17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그 여인은 다윗왕을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악을 분간하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악을 분간한다는 것이 왕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다스리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솔로몬왕이 일천 마리의 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받고 싶은지 구하라고 하셨을 때 그가 한 말에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3:9). 그리고 이 일 후에 바로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나옵니다 (3:16-28). 한 아이를 놓고 싸우는 두 여인의 사건 말입니다. 이 곤란한 사건을 솔로몬은 그 아이를 반으로 갈라서 나눠 주라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지 가려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의 놀라운 지혜가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성경에서 ‘선악을 안다’ 또는 ‘선악을 분별한다’는 것이 통치자로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여 잘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 본문인 창세기 3장의 앞 내용들을 잘 살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후 세상의 여러 것들을 만드실 때마다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셨습니다. 빛을 만드시고 좋았다고 하셨고 땅과 바다를 만드신 후에도 좋았다고 하셨고 식물을 만드신 후에도 좋았다고 하셨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에도 아주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을 보시고는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그것들이 좋은지 안 좋은지 판단을 내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선악을 분별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행위입니다. 훨씬 더 지혜와 경륜이 필요한 행위이지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을 때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자신처럼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3:22).

참으로 사탄이 말한 대로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로 선악을 분별하여 세상을 다스리시듯이 선악과를 먹은 사람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선악을 분별하여 세상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통치자나 재판관을 신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82:1-6).

결국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분별하게 되는 것은 작은 신 즉 왕이 되는 것입니다. 왕적인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창조되었을 때 도덕적 선악개념은 있었지만 이런 왕적인 선악분별개념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담은 아직 성숙한 지혜가 없는 사람 즉 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어린 사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영적 어린이였던 것이죠. 이런 어린 아담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자라가면서 또 에덴 동산에서 여러 일들을 경험하면서 지혜가 자라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듯이 말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5:12-14). 그렇게 지혜가 자라고 성숙해진 후에는 선악과를 먹고 세상의 통치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때 이르게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왕위를 받기 위한 필수조건, 즉 왕위를 하사하실 왕중의 왕 하나님께 순종하는 과정 없이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견습과정을 거치지 않고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안 좋은 결과가 생긴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판단하지 못하는 아직 어린 상태에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준비가 덜 된 왕이 되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선악을 분별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충분한 지혜와 경륜이 쌓이지 않은 상태라 선악을 제대로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결해야 할 골치아픈 일들이 밀려드는데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비참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 끔찍한 사실을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바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7-10).

보통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다는 창세기 2장 25절의 말씀을 죄가 없이 순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가 없는 순전한 상태였다는 말은 맞지만 벌거벗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롭게 되어서 천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도 죄성이 없는 상태이지만 벌거벗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벌거벗었다는 것은 미성숙을 의미합니다. 아직 어떤 중요한 일을 하도록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아무 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의사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직 의사 가운을 입지 못하고 있고 경찰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직 경찰 제복을 입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미성숙한 상태이지만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여기서 부끄러움은 수줍음이 아니라 수치를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기들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만큼 아직 성숙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미성숙한 상태였지만 아직 세상의 통치자로서 세움받지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자기가 통치자가 된 것을 안 순간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평소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있을 때는 자신이 무엇을 이끌어 나갈 일이 없으니까 편안하게 있다가 사람들 앞에 서서 무언가를 하려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자신이 사람들을 이끌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끼는 것이죠. 그래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할 말이 준비 안 된 상황에서 사람들 앞에 연사로 서거나 우리의 작품이 볼품없는데 사람들 앞에 내놔야 하는 경우에 많이 합니다. 이처럼 아담도 자신이 아직 통치자로 설 능력이 안 되는 것을 것을 알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울은 새로운 아담입니다. 그도 왕이 될 때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왕으로 뽑히기 전에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새 사람이 되기는 했지만(삼상10:6 이하), 아직 훌륭한 왕이 되는 데 필요한 성숙한 지혜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으로 뽑혔을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짐 보따리 사이로 숨었습니다(삼상10:22).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왕의 역할을 해야 했을 때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숨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한 사울은 아담의 사례에서 배웠어야 했습니다. 아담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는 결국에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악함과 약함을 의뢰하여 죄의 용서를 받은 것처럼 사울도 자신의 부족함을 자신의 힘과 방법으로 해결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뢰해야 했습니다.1 그러나 그는 거듭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습니다.

이에 반해 다윗은 자신이 충분히 준비될 때까지 왕이 되는 것을 미뤘습니다. 이미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왕이 되기로 정해져 있었지만 서둘러 사울의 왕위를 찬탈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결정적인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사울을 죽이면 도피생활의 고난을 바로 끝내고 왕이 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된 도피생활을 하면서 성숙해졌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대상인 예수님도 자신이 충분히 성숙해질 때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도 이미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왕이 되도록 선택되셨습니다. 그래서 40일 금식 후에 사탄이 왕위를 주겠다고 제의했을 때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의 고난의 세월을 보내지 않고 바로 왕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엄청난 고난을 겪지 않고 쉽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시고는 부활하여 만유의 왕이 되셨습니다(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히5:8-9).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왕이 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그러나 아직 준비가 덜 된 왕입니다. 아직은 더 자라야 합니다. 그러니 주제넘게 왕적 통치를 하겠다고 바로 덤비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사울처럼 됩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고난과 순종을 통해서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충분히 성숙해진 후에야 참된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공평과 의로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왕권을 휘두르려고 하면 자신의 욕심 때문에 전쟁 중에 있는 자신의 백성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던 사울처럼 됩니다(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였더라. 삼상14:24). 자신의 권력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쓰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쓰는 사람이 돼 버립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울의 길이 아닌 다윗과 예수님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1 아담이 하와를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아담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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