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본문: 창2:4-25
2011년 2월 13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오늘부터 ‘구속사 이해’라는 제목으로 네 번에 걸쳐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 동안 ‘언약과 구원’에 대하여 꽤 오랫동안 설교했는데 그 내용들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 언약과 구원의 관계,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성, 교회와 성례 등을 바로 아는 데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오늘부터 설교하는 내용은 다른 면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이 어떻게 살도록 의도하셨는지 그리고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 계획이 틀어졌을 때 어떻게 그 최초의 의도를 이루시고 계시는지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흔히들 창세기 1-3장은 내용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해가 어려워서 그냥 대충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당최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으니 ‘하나님께서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셨고 아담이 하나님 명령을 어겨서 세상이 타락하게 되었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 가는 것이죠. 그러나 창세기 1-3장, 특히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내용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핵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나머지 성경 전체의 해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또 커다란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연구 결과 오늘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셨다. 그리고 그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나게 하시고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지 말라고 하셨다. 이 금지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나무 열매를 주셔서 그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실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명령을 어기고 그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자신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 결과 세상은 죄로 인한 온갖 오염과 부패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 엄청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가 하신 일은 아담이 저지른 일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수동적 순종(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죄책과 심판을 없애고 능동적 순종(모든 계명 준수)으로 우리가 영생을 받게 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의 순종으로, 우리는 죄를 짓기 전의 아담 상태로 되돌아 간 다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시험을 통과한 것으로 간주되어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게 즉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많이 익숙한 내용이지요? 이 해석은 일반 크리스천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이해가 성경적일까요? 지금부터 찬찬히 알아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해석이 그 두 나무에 관해서 어떤 전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해석은 선악과(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는 것이 완전히 금지된 열매였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유일한 용도는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열매는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좋고 지혜롭게 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순전히 시험용이었습니다. 탐스럽지만 독이 든 열매였습니다. 둘째로 생명나무 열매는 아담이 시험을 통과한 후에 주어질 상이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시험 전에는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험을 통과한 댓가로 주어질 영생의 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아직 영생을 받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제들이 맞을까요? 먼저 두번째 전제부터 보겠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시험을 통과한 후에 상으로 주어질 예정이었습니까? 시험 전에는 먹을 수 없었습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2장 16-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여기 보면 선악과만 금지되어 있고 나머지 열매는 모두 먹도록 허용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생명나무 열매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생명나무 열매는 시험을 통과한 댓가로 주어질 상이 아니고 그냥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뭔가를 해야 주어질 댓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생령 즉 살아있는 존재,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2: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이미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뭔가를 해야 영생을 얻는 그런 행위구원적 요소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영생은 그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담에게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는 노동과 임금을 교환하는 고용자와 고용주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아무 댓가없이 사랑을 주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한편 아담은 피조물의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아담은 항상 배가 고픈 존재였습니다. 항상 뭔가가 부족했고 항상 뭔가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이미 생명은 주어졌지만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밥이 필요하듯이 아담도 창조될 때 이미 영생이 주어졌지만 그 영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밥이 필요하듯이 아담도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영적인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이제 그런 아담 앞에 두 나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금지된 열매이고 하나는 허용된 열매입니다. 금지된 열매인 선악과는 굉장히 탐스러워 보입니다. 먹음직스럽고 아름답고 먹기만 하면 굉장한 지혜를 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열매를 따 먹으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죽습니다. 허용된 열매인 생명나무 열매는 덜 탐스러워 보이지만 따 먹으면 영적으로 더 튼튼하게 자라갑니다. 아담 안에 이미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더 자라갑니다. 아이가 밥을 먹으면서 어른이 되어가듯 영적으로 아직 아이인 아담도 생명나무를 먹으면서 영적으로 어른이 되어갑니다.

이제 첫번째 전제를 보겠습니다. ‘선악과는 그냥 시험용이고 영원히 따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본문 2장 17절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리고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 실제로 죽었으므로 선악과는 영원히 먹어서는 안 될 그런 열매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장 29절에 이상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이 구절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열매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2장 17절에서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그러시고 1장 29절에서는 선악과를 먹을 수 있다고 그러시고.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두 말씀을 동시에 발효시키지 않으셨다고 해석하면 됩니다. 일정 기간 선악과를 따 먹도록 허용하셨다가 후에 금지하실 계획이었거나 아니면 일정 기간 선악과 따 먹는 것을 금지하셨다가 후에 허용할 계획이었다고 보면 되는 것이죠. 이 중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본문을 자세히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2장 17절 말씀은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모든 과일을 허용하는 1장 29절 말씀은 하와가 창조된 후에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너희에게 주노니’ 주목). 그러니까 선악과에 대한 금지명령을 내리시고 나서 나중에 ‘모든 과일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악과 금지가 한시적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주시지도 않을 선악과를 아주 탐스럽게 만들어서 시험용으로 눈 앞에 두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괜히 주지도 않을 거면서 사람 약 올리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서 영적으로 자라가면 나중에 선악과를 주실 예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 단계의 삶이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생명이 자라가는 삶, 그 다음에는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분별하면서 살아가는 삶. 한편 이 1단계의 삶에서 2단계의 삶으로 넘어가는 데는 어떤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했는데 이 변환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선악과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 변환에 대한 맛보기가 주어집니다. 이 경험은 2:21-22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기 나오는 ‘잠’은 ‘보통 잠’과 다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도 여기 나오는 잠은 보통 잠과는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잠은 꼭 죽은 것 같은 잠입니다. 그래서 그 히브리어 단어를 “깊이 잠들게”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 ‘깊은 잠’ 뒤에는 일종의 부활이 따라옵니다. 요나는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난 후에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욘1:5과 그 이하). 깊이 잠들기 전에는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거역하다가 깬 후에는 그 명령을 따랐습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존재로 부활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본문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가 깨어나게 하셨습니다. 잠들기 전과 후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잠들기 전에는 혼자였지만 이제는 둘이 되었습니다. 잠들기 전에는 혼자 사느라 ‘사랑,’ ‘배려’ 등과 같이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지만 이제는 그런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깊은 잠 후에 더 영광스러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깊은 잠에 빠졌다가 더 영광스러운 상태로 부활하는 경험을 통해서 다른 단계로의 변환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더 성숙해진 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악과를 먹으면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변할지를 미리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통한 변환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경고하십니다. 아담한테 지금 선악과를 먹으면 바로 죽는다고 경고하십니다. 의인에게는 깊은 잠을 통한 변환이 축복이지만 악인에게는 깊은 잠이 죽음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사사기 4장에서 시스라는 ‘깊이 잠든’ 후에 야엘의 말뚝에 박혀 죽었습니다. 시편 75:6에서는 출애굽 때 이집트 군대가 홍해에 빠져 죽은 것을 ‘깊이 잠들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깊은 잠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으면 그는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변환은 할 것이지만 죽음으로 가는 변환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성급히 따 먹으면 축복이 오히려 저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누에가 성충이 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누에는 고치를 만들기 전에 열심히 뽕을 먹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영양을 섭취하여 충분히 자라면 입에서 실을 내어 자신의 몸을 감쌉니다. 이렇게 열심히 견고한 고치를 만든 후에 그 안에서 변환을 합니다. 애벌레가 성충으로 변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고치를 뚫고 나옵니다. 자신의 옛 몸을 버리고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떤 누에들은 뽕을 충분히 못 먹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런 누에들도 때가 되면 자기도 고치를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충분히 영양을 섭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딱딱한 고치를 완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 누에들은 미완성된 엉성한 고치 안에서 죽습니다. 이렇게 죽은 누에들은 심한 악취를 풍깁니다. 뽕을 열심히 먹어서 ‘좋은 변환’을 택한 고치는 예쁜 날개가 달린 성충으로 부활하는 반면에 뽕을 제대로 먹지 않은 고치는 사망의 냄새를 풍기는 ‘나쁜 변환’을 하는 것이지요.

아담은 나쁜 변환을 택했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열심히 먹어서 충분히 성숙해진 다음에 선악과를 먹는 길을 택하는 대신에 바로 선악과를 먹는 길을 택했습니다. 선악과가 너무 먹음직스럽고 또 먹으면 바로 지혜를 줄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고 바로 먹었습니다. 오랫동안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길 대신에 바로 영광을 취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과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성급하게 성충이 되고자 했던 누에처럼 악취를 풍기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담과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급하게 선악과를 먹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때 이르게 영광을 취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성급하게 사역을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이 말하는 대로 그는 기다리시면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셨습니다(눅2:52) 그리고 율법에 정해진 대로 30세가 되어서야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렇게 성숙될 때까지 기다리신 결과 그는 악을 이기고 ‘좋은 변환’을 맞으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는 형벌의 성격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기 때문에 죽음 후에 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했습니다.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변했습니다. 아담이 성급하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가져왔던 재앙을 다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아담이 실패했던 것을 성공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 복된 부활이 여러분의 소망이 되고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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