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마 5:6

2015년 5월 24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목사

 

우리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본문의 ‘의’를 개인적 종교적인 의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의’라는 말을 개인적 종교적 의미로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 말을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죄인이 아닌 것처럼 즉 죄 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여기신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의를 주로 개인적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본문을 두 가지 중 하나로 해석합니다. 첫째, 본문의 의를 칭의적 의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완전하심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의가 누더기같은 것을 발견하고(1복) 그에 대해 애통해하면서(2복) 완전한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하게 됩니다(4복).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의를 주시는 의로우신 예수님께 나아가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불의를 보시지 않고 예수님의 의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주림과 목마름이 충족됩니다. 우리가 배부르게 됩니다. 이 설명은 논리적이며 그 자체로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가 가리키는 것이 칭의적 의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팔복은 예수님께서 이미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칭의를 받은, 즉 하나님께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본문의 의를 성화적 의로 보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비록 칭의를 받았지만 여전히 죄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것을 알기 때문에(1복) 그에 대해 애통해하면서(2복)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됩니다. 이런 목마름은 우리가 우리의 죄성을 죽이고 열심히 의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의로와지게 하셔서 우리가 의로 배부르게 하십니다. 이 해석은 신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앞의 해석보다 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의는 성화적 의를 넘어섭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화적 의는 본문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의가 아닙니다.

본문이 성화적 의에 관한 내용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둘이 있습니다. 첫째, 팔복의 순서상 본문 즉 4복은 3복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의를 칭의적 의나 성화적 의로 보면, 앞에서 본 것처럼 본문이 1복, 2복과는 연결이 되는데 3복과는 잘 연결이 안 됩니다. 우리의 의가 누더기같아서 애통해하고 그래서 완전한 의를 원한다는 설명은 1,2복과 4복을 연결시킬 뿐 어떻게 3복이 4복과 연결이 되는지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마음이 온유한 것이 어떻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과 연결이 되는지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같은 팔복 안에 있으므로 본문 즉 4복의 의는 8복의 의와 의미가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에 말씀 드린 대로 4복과 8복은 대응관계에 있으므로 더더욱 그 의미가 같아야 합니다. 4복은 의에 목마른 상태를 8복은 그 의를 실천하는 행동을 말하고 있으므로 그 둘의 의미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잘 지적한 대로 의로운(righteous) 사람은 숭배나 무시의 대상이 되지 박해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박해를 받는 사람은 정의(justice)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1 그러므로 8복이 말하는 의는 개인적 종교적 의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4복이 말하는 의도 개인적 종교적 의가 아닙니다. 대신에 개인적 종교적 의가 사회에 적용된 의 즉 사회 정의입니다.

사실 개인적 종교적 의가 사회적 의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개인적 종교적 의는 가짜입니다. 본문을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셨을 구약에는 개인과 종교에 한정되는 의란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개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라고 부르지만 그 율법에는 가난한 자, 과부, 고아, 외지인 등의 약자를 돌보라는 조항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개인적 종교적으로 의로우려면 사회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참석해서 종교의식은 잘 지키지만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미쉬파트)를 물같이, 공의(체다카)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5:21-24).

위의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의만 지키는 것은 의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대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종교의식만 행할 것이 아니고 사회에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의로 번역된 히브리어 ‘체다카’는 ‘옳은 기준을 지킨다는 의미에서의 의’의 뜻도 가지고 있지만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긍휼히 여겨서 도와 주는 의’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2 그래서 다음 구절들에서처럼 어려운 상태에 놓인 사람을 도와주고 부당하게 압제 당하는 사람을 도와준다는 뜻으로도 많이 쓰입니다.

“주는 주의 공의(체다카)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단9:16)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체데카)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체데크)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시72:1-4).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 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체데카)이 되리라.” (신24:12-13).

위의 구절들에 쓰인 체다카나 체데크의 헬라어 상응어가 본문에서 ‘의’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디카이오수네’입니다. 따라서 디카이오수네는 체다카나 체데크처럼 ‘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본문에서 말하는 의는 의(개인적 종교적 의)보다는 정의(사회 정의)를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본문의 의를 이렇게 사회 정의로 본다면 본문은 직전 복인 3복과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온유하면 의에 주리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불의를 바로 잡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참게 되면 의에 주리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온유하게 되면 오히려 미래에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불의를 그냥 지나치게 되기 쉽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정의를 강조하지 않고 온유함만 강조하는 많은 기독교 사회의 현상입니다. 그러면 3복과 4복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우리가 온유를 강조하다 보면 불의를 묵인하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4복은 그런 오해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온유해야 하지만 즉 하나님이 불의를 바로 잡으실 것을 믿고 바라면서 참고 기다려야 하지만, 동시에 의에 주리고 목 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이것을 바로 잡아 주실 분이 없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과격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폭력을 써서라도 불의를 우리가 바로 잡으려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가족 중 한 명을 누가 살해했을 때 그것을 바로 잡을 정부가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살인자를 찾아가서 직접 보복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의 불의를 바로 잡을 분이 없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직접 나서서 폭력을 써서라도 정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불의를 바로 잡을 분이 계시니 하나님 앞에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것이 온유입니다(시37:7).

하지만 이것이 불의를 묵인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해 애통해하면서 끊임 없이 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세상의 불의가 바로 잡힐 것을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악을 선으로 갚으면서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시37:3). 이것이 온유의 의미입니다. 온유하라는 것이 불의에 무관심하라는 뜻이 절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의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말씀하시기 바로 전에 지금 천국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의(체데크)와 공평(미쉬파트)이라고 말합니다(시89:14; 97:2).3 그러나이스라엘과 유다는 의와 공평을 실천하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함에 따라 의를 행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서 올 메시아를 다음과 같이 공의(의, 정의)를 행하는 존재로 소개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체데크)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샤파트, 즉 다스리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체데크)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사11:1-5).

메시아가 와서 공의로 다스리면서 다시 의와 공평이 통치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메시아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사람들에게 의에 주리고 목 말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의 즉 정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은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분투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로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은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예제도가 철폐되고 신분제도가 타파되고 차별을 조장하는 온갖 제도가 폐지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착취에서 풀려나고 억압 받는 사람들이 해방됩니다(눅4:18-19). 그러나 이런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정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이루어집니다. 정의를 갈망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그렇게 크리스천이 많은데도 불의가 판치는 것을 보십시오. 왜 그런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크리스천들이 정의를 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의를 개인적 종교적 의로만 보는 바람에 사회정의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구원 받고 하늘나라 가는 개인적 종교적 의만 추구하느라 사회정의를 부르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1Nicholas Wolterstorff, Justice: Rights and Wrong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p. 111.

2체다카(체데크)는 의미의 스펙트럼이 넓어서 정확히 번역하기 어렵다. 굳이 그 뜻을 표현하자면 ‘의(옳음), 또는 ‘긍휼(compassion)을 내포한 정의’ 정도 될 것이다. https://www.ou.org/torah/parsha/rabbi-sacks-on-parsha/tzedek_justice_and_compassion/, 2015년 5월 23일에 참고함.

3미쉬파트는 ‘다스리다’의 뜻을 가진 샤파트에서 파생된 단어로 ‘법적 정의’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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