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마 5:5

2015년 5월 17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목사

 

‘온유’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온화함, 부드러움, 순함 등을 떠올립니다. 그런 특성들이 온유라는 단어의 뜻인 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 팔복에서 의미하는 온유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팔복은 거듭 나지 않은 자연인이 가지는 특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팔복의 온유에 대해서 마틴 로이드존스는 그의 책 ‘산상설교집’에서 아주 탁월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복은 1복과 2복의 결과이다.1 즉 자신의 영적 가난과 무능을 느껴서 심령이 가난해진 우리는 자신의 영적 비참함에 대해 애통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심령의 가난함을 느끼고 죄에 대해 애통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비참한 죄인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남들도 우리를 비참한 죄인이라고 말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인정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분개한다. 그러나 온유는 이미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인정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선선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나쁘게 말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영적 가난함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어, 자기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온유한 사람은 또 자기에 대해 민감하지 않다. 자신에 대해 방어적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자신이 뭔가 내세울 만한 것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뭔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자기를 바로 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존 번연이 잘 말한 것처럼 이미 ‘넘어져 있는 사람은 넘어질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온유한 사람은 또 자기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고 느끼므로 자기를 자랑스럽게 여기도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주장하지도 않고 자기를 위해 무엇인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입니다. 로이드존스의 설명대로 온유함은 우리가 우리를 보는 시각을 다른 사람에게도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이 쉽지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가난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이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우리 안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추악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이 “그래 맞아, 너 추악한 죄인이야!”라고 말하면 바로 “뭐야?”라고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같은 찬송가를 아무 거부감 없이 “아멘, 아멘.” 하며 부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향해 ‘너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또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노래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런 노래를 듣는 순간 주먹이 날아 가든지 아니면 최소한 우리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질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우리를 평가하는 것과 남이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왜 달라야 합니까? 우리가 우리를 추악한 죄인이라고 인정했으면 남이 우리를 추악한 죄인이라고 말한대도 그리 화낼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가 우리를 악평하는 것을 들으면 바로 “지가 뭔데 나를 평가하고 난리야? 저는 뭐 잘 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의 모든 다툼은 우리의 이런 태도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가 부부싸움 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툴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누가 우리를 공격하면은 “그런 너는 잘 했냐?”라면서 상대방이 잘못한 것을 들춰내서 바로 되치기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우리를 비판해도 그 비판이 맞다면 겸허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위대한 왕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왕이 되도록 내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사울왕의 공격을 되받아쳐 그를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온유함으로 그는 악한 사람의 저주를 겸허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사무엘하 16장 5-14절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의 공격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초라하게 도망을 갈 때 사울의 친족 중의 하나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다윗에게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라고 저주를 퍼 붓습니다. 이에 장군 중의 하나가 분개하여 가서 목을 베게 해 달라고 청하자 다윗은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두라”라고 말합니다.

시므이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다윗에게 그런 저주를 퍼 부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요나단 때문에 사울 족속을 너그럽게 대했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듣는 것이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사악한 짓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에, 밧세바와 간음한 것도 모자라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그녀의 남편 우리야, 자신의 충직한 부하 우리야를 살해했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죄로 인해 자기가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한 시므이가 저주하는 것도 달게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참으로 우리가 죄인임을 안다면, 참으로 우리의 영적 가난함을 깨닫고 있다면,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다른 사람들의 바른 지적을 기꺼이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온유함입니다.

지금까지 온유한 사람의 특성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왜 그런 온유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내용이 맞기는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의도하신 내용은 아닙니다. 본문은 시편 37편 11절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를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본문을 말씀하실 때 의도하신 내용을 알려면 시편 37편을 살펴 봐야 합니다. 시편 37편 중 오늘 본문과 관계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37:1-11).

이 내용을 보면 우리가 온유함에 대해서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내세울 것이 없는 죄인이니 온유해야 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악인을 사라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성실을 의뢰하며 선을 행하는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니 온유하라는 말이 나올 뿐입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바로잡아 주시는 분이시니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분노하며 불평하지 말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라는 내용이 나올 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는 하나님께서 불의를 바로잡아 주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에 온유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온유를 이렇게 보지 않고 자신의 영적 비참 즉 자신의 영적 가난 때문에 온유한 것으로 보면 본문 즉 3복은 2복보다는 1복과 더 관계가 깊어 보입니다. 그러나 팔복의 순서상 3복은 1복보다는 2복과 더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3복의 온유를 그 인용처인 시편 37편에 기초해서 해석하면 2복과 3복의 인과관계가 확실하게 성립이 됩니다. 즉 주위에서 벌어지는 악과 불의를 보면서 참으로 애통해하는 사람은 그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분노가 생기고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들을 응징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시편 37편이 암시하듯이 복수하고 응징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정의의 하나님께서 불의를 바로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행악자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 알아서 처분해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2

이처럼 본문에서 말하는 온유는 사회불의와 관련된 온유입니다. 개인적 겸손과 관계된 온유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온유를 개인적 겸손과 관련시켜서 생각하는 이유는 2복의 애통을 주로 개인적 애통으로 한정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개인의 영성만을 말하고 계신 게 아닙니다.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계십니다. 특정 상황과 관계없는 무시간적(無時間的) 개인적 영성을 말씀하고 계시지 않고 당시의 상황에 관계된 영성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3복을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의도는 3복에 붙어 있는 약속 즉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가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주제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누가 땅을 기업(基業)으로 받을 것인가’입니다. 아담은 창조시에 온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차질이 생기면서 이제는 아무나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는 없게 되었고 특정한 사람만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으로 선택된 사람 중의 하나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편 2편이 잘 말하고 있듯이 때가 되면 메시아가 온 땅을 기업으로 받아서 아담의 저주를 되돌릴 것입니다.3 그러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당시에는 누가 예수님과 함께 온 세상을 기업으로 받을까요? 그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의 3복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땅을 빼앗긴 채 로마의 압제 밑에서 하나님이 아닌 로마황제를 왕으로 섬기며 살아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많은 유대인들은 이런 로마의 행악에 애통해하고 분노하며 로마를 무력으로 물리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 줄 강력한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크리스천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악을 행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십자가에서 악을 삼키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고 가르치면서 온유함을 실천했습니다(마5:38-42; 롬12:7; 벧전2:23).

그 결과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 했던 유대인들은 유대전쟁 때 멸망 당하고 온유함을 실천했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즉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이로써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이 아닌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실 것을 믿고 바라면서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이 되고 싶습니까? 온유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13복의 ‘온유한’은 헬라어 πραΰς(프라우스)를 번역한 것인데 그 단어의 뜻은 ‘겸손한,’ ‘온유한’이다. 그리고 이 단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עָנָו(아나브)의 뜻은 ‘가난으로 고통받는,’ ‘겸손한,’ ‘온유한’이다. 그러니까 1복의 심령의 가난함과 3복의 온유함은 뜻이 거의 같다. 그러나 그 둘은 예수님께서 별도의 복으로 말씀하실 정도로 확실한 차이가 있다. 심령의 가난함이 자신의 상태의 평가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온유함은 하나님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2다음에 보겠지만 이것이 우리가 불의를 그냥 두고 보라는 뜻은 아니다.

3“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2:7-8).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