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의 유아 살해

본문: 마2:16-18

2014년 11월 9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오늘 본문에는 헤롯이 2살 이하의 유대인 아이들을 학살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끔찍한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알려면 헤롯이 어떤 인물인지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헤롯가는 아버지인 안티파터 때부터 놀라운 정치 수완으로 로마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헤롯은 로마에 의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의 백성들인 유대인들로부터는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2세기에 유다 마카비와 그 형제들은 유대의 독립운동을 이끌어서 마침내 셀류코스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에 스며들었던 헬라의 이교적 요소를 제거했습니다. 특히 더럽혀졌던 성전을 정화하고는 중단되었던 제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카비의 조카 요한 히르카누스는 세력을 이방에까지 뻗쳐서 이두매(에돔)를 정복하고는 그들에게 그 곳을 떠나든지 유대인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여 그들을 유대인으로 개종시켰습니다. 헤롯의 조상도 이 때 할례를 받고는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이 강제 개종을 인정하지 않아서 헤롯을 유대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헤롯이 로마의 힘을 빌어 유대의 왕이 되었지만 정작 유대인들로부터는 왕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왕위의 정통성을 부정 당하는 데다가 유대를 이방제국에서 해방시킨 마카비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헤롯은 늘 자신의 왕위 유지에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왕위 유지에 위협세력인 하스몬 왕족들과 그들의 수많은 지지자들을 죽였는데 이런 증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졌습니다.1 결국 그는 왕위를 지키려는 강박관념이 지나쳐 자기 아들들과 자신의 총애하는 부인까지 죽였습니다. 심지어는 죽기 5일 전에 병상에 누워서까지 또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아학살 사건도 이런 그의 태도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많은 정적들을 죽여서 자신의 왕위가 확고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에게 경배하러 왔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까? 자기가 현재 유대의 왕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단지 그냥 추측으로 온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의 인도를 받고 왔습니다. 이러니 안 그래도 있었던 강박증세가 더 심해져서 자신의 왕위에 대한 불안감이 다시 확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베들레헴과 그 인근의 유아들을 다 죽인 것입니다. 화근을 확실히 없애려고 나이를 위 아래로 넓게 잡아서 갓 태어난 아이부터 2살짜리까지를 다 죽였습니다.

헤롯의 이런 행동은 그냥 언뜻 보면 자신의 왕위를 지키려는 단순한 정치행위처럼 보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건으로 사건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헤롯의 이 행위는 여느 왕위쟁탈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그가 대적한 대상이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야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죽인 것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장대한 구원역사를 방해하려는 사탄의 술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시야 출현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곤란에 처해 있을 때마다 메시야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학정에 시달려서 신음하고 있을 때는 모세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여러 이방 나라들의 압제에 시달릴 때에는 사사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또 그 후에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시달릴 때는 다윗이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메시야의 존재는 사탄에게는 눈엣가시였습니다. 열심히 백성들을 유혹하여 실컷 자기 백성들로 만들어 놓았더니 메시야가 나타나서 빼앗아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탄은 헤롯과 유대인들을 도구로 해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기 계획을 무산시킬 상황에 처했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야의 탄생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시도는 그 역사가 유구합니다. 사탄은 가인을 통해서 아벨을 죽임으로써 경건한 계통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바로와 아비멜렉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빼앗음으로써 약속의 자손이 태어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바로를 통해서 모세를 죽이려 했습니다. 사울을 통해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아달랴를 통해서 유다 왕족을 몰살함으로써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지금 헤롯을 통해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은 이런 사탄의 메시야 제거 작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헤롯을 통해 기어코 죽이려 했던 새롭게 태어날 메시야는 어떤 분일까요? 예전과 비슷한 메시야일까요 아니면 뭔가 다른 메시야일까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마태복음 2장을 잘 살펴보면 마태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옛날에 바로가 히브리 아이들을 죽일 때 살아 남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새로운 바로 헤롯이 유대인 아이들을 죽일 때 살아 남으셨습니다. 모세는 옛날에 바로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갔다가(출2:11-15) 나중에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이 죽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왔습니다(출4:19).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헤롯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갔다가(13-14절)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이 죽었다는 주의 사자의 말을 듣고 돌아옵니다(19-20절). 이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의 다른 내용들도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그리고 있습니다. 5-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서 율법을 해석하십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교회를 만드시는데 모세도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먼 옛날 출애굽 때 놀라운 능력으로 이스라엘에 구원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베푼 구원은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기본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체계에 바탕을 둔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함으로써 모세의 구원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님의 구원은 다를까요?

시작을 보면 예수님의 구원도 별 다를 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탄생 때부터 애꿎은 베들레헴의 아이들이 죽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이 사건을 유다가 멸망해서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에 비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인상을 더 강화시킵니다. 17-18절은 베들레헴 유아학살 사건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다음의 구절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마을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멸망해서 포로들이 끌려갈 때 거쳐갔던 곳입니다(렘40:1). 한편 라헬의 아들 중의 하나인 베냐민은 후에 유다 왕국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니까 라마에서 라헬이 자식이 없어서 통곡한다는 것은 유다왕국이 자신의 자녀들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 통곡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라헬을 넣은 것은 그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서 자식 없는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서의 인용구는 라헬이 자식이 없어서 겪은 슬픔을 비유로 해서 유다왕국이 자식들을 잃은 슬픔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입니다.2 그리고 마태는 현재 베들레헴에서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모습이 이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이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는 베들레헴의 유아학살 사건을 유다 멸망 사건처럼 단지 그냥 비극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마태가 베들레헴 유아 학살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한 예레미야 구절의 맥락입니다. 그 구절의 바로 다음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렘31:16). 이 구절은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니 눈물을 멈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야 구절은 바벨론 유수의 슬픔을 말하되 그것을 회복과 구원의 맥락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3

실제로 인용구가 속해 있는 예레미야 31장의 뒷부분인 31-34절에서는 어떤 날이 올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 날에 맺으실 언약이 모세 때 맺으신 언약과 다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 때는 율법을 돌판에 주셨지만 그 날에는 율법을 사람들의 마음에 새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3절). 돌판에 새겨진 율법은 그냥 다른 사람의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따르려 해도 그게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새겨진 율법은 우리와 한 몸이 된 우리 생각, 우리 신념, 우리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모세 때는 백성들이 언약을 깨뜨렸지만 그 날에는 백성들이 언약을 신실히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3절). 그 결과 모세 때는 죄를 기억하여 심판하셨지만 그 날에는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4절). 히브리서 8장에 따르면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과 맺으신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언뜻 보면 유아학살의 비극을 묘사하기만 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이런 비극을 다 되돌리실 위대한 진정한 구원자이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유다 마카비와 요나단의 사후에 통치권을 이어 받은 그들의 형 시몬이 세운 왕조를 하스몬 왕조라고 한다.

2 앞에서 인용한 문장의 “자식이 없으므로”는 문법적으로 자식을 낳지 않아서 없는 경우와 자식을 잃어서 없는 경우 둘 다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라헬이 자식을 낳지 못해서 슬퍼하는 것과 유다가 자식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슬퍼하는 것 둘 다를 가리키는 절묘한 선택이다.

3 그 구절의 앞 부분인 렘31:1-14도 유수지에서의 귀환과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용구의 앞뒤 구절들이 모두 희망과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thoughts on “헤롯의 유아 살해”

  1. 9번째 단락 첫째줄에 ‘마태복(음)은’ 으로 수정할 것 발견했습니다.^^
    자꾸 지적질(?)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목사님 설교의 완성도에 공헌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

    구원의 메시지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벅찹니다.
    공자가 말하는 ‘종심’의 단계가 그러하듯
    저도 율법이 제 마음에 새겨짐으로
    언약을 신실히 지키고 싶어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해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그런 삶!

    1. 자꾸 지적질하셔도 괜찮습니다. 오타는 고쳐져야 하니까요. ^^ 종심!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해서 찾아 봤습니다. 그랬더니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 같네요. 지천명, 이순 같은 거는 생각나는데 종심은 까마득하네요. 다시 배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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