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사람 예수

본문: 마2:19-23

2014년 11월 16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온갖 악행을 행하던 헤롯이 드디어 죽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위협이 사라졌습니다. 이에 주의 사자가 이집트에 있던 요셉에게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말하고 요셉은 이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를 다스리게 된 사람이 아켈라오라는 말을 듣고는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 하던 차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갈릴리 땅으로 가서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가서 살게 됩니다.

요셉이 아켈라오를 두려워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땅은 헤롯의 아들들이 나눠서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아켈라오(Archelaus)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를 물려 받았고, 헤롯 안디바(Antipas)는 갈릴리와 베레아(Perea)를 물려 받았으며, 빌립(Philip)은 이두래(Iturea), 드라고닛(Trachonitis) 등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켈라오의 통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 포악했던 그는 유명한 랍비 둘이 사형당한 것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에 시위가 일어났을 때 무려3000명을 죽였습니다. 이 중에는 유월절 순례객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잔혹한 통치가 이어지자 유대와 사마리아의 리더들은 계속 로마에 청원했고 결국 아켈라오는 재위 9년만에 폐위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말썽이 생기기 쉬운 유대와 사마리아를 직접 통치하기로 하고 총독을 보내어 다스렸습니다. 요셉이 유대로 가기를 꺼려한 것은 이런 아켈라오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떠나서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유대 베들레헴에 정착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가려고 했던 곳이 그냥 유대라고 나오지만 우리는 그들의 행선지가 베들레헴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는 원래 나사렛에 살았었습니다(눅1:26-27). 그런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을 내림에 따라 조사에 응하러 모든 사람들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눅2:1-3). 마찬가지로 요셉도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자기 조상의 마을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예수님을 낳게 되었습니다(눅2:4-7).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을 때도 베들레헴에 있었던 것을 보면 인구조사 후에도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베들레헴에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않고 베들레헴에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곳이 자기 조상들이 살던 곳이라서 살기 편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 때까지 그 곳에 살다가 나사렛으로 이주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요셉으로서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이었으니 정착하기가 매우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외에도 우리는 다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들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장차 유대인의 왕이 될 아이가 살기에 베들레헴보다 더 적합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다윗 왕의 뒤를 이을 아이니 다윗의 궤적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원래 나사렛에서 태어날 뻔했던 예수님도 인구조사라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요셉 입장에서 살 곳을 정할 때 아이를 베들레헴에서 키워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왕이 되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이 뭐가 있겠습니까? 또 베들레헴은 정치와 종교의 중심 예루살렘에 가까우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교류해서 왕이 될 기반을 쌓는 데는 나사렛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집트에서 돌아올 때 요셉은 분명히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정치상황을 움직이셔서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을 막으시고 직접 지시하셔서 갈릴리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요셉이 선택할 곳은 전에 살던 나사렛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와 함께 나사렛에 가서 살게 된 것을 성경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그가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리라”는 것을 이루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 그런데 이 구절은 해석하기에 한 가지 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에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구절이 한 군데도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구약에는 나사렛이란 지명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구약시대 말에나 생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에 나사렛이 어떤 마을이었는지 그 특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나사렛은 예수님 당시에 인구가 최대 5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나사렛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대, 심지어 같은 갈릴리 사람들에게도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는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은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못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7:52). 그런데 이런 갈릴리 중에서도 나사렛은 더욱 무시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같은 갈릴리의 가나 출신인 나다나엘조차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말할 정도였습니다(요21:2; 1:45-46). 따라서 당시에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무시를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내용은 없지만 그가 볼 품 없어서 멸시를 받고 거절을 당한다는 내용들은 많습니다. 다음은 그 중의 일부입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시22:6-8).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사49:7).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2-3).

그러니까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리라는 말은 구약의 어느 특정 구절을 가리키지 않고 메시야가 멸시를 받으리라고 말하는 여러 구절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의 구절들처럼 실제로 멸시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 때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왕 흉내를 낸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혀 놓고는 그 앞에 장난 삼아 무릎 꿇고 침 뱉고 머리를 치는 등 조롱을 일삼았습니다(마27:27-31).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게 사람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조롱하였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은 구원했지만 자신은 구원할 수 없다”며 조롱했습니다(마27:39-44). 예수님께서 유력한 가문의 랍비 출신이라면 이런 대접을 받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출신이라면 이런 조롱을 받으셨을까요? 메시야 사역의 특성상 여전히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겠지만 이처럼 심한 조롱은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러자 나다나엘이 한다는 말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여러분 이런 말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인지 아십니까? 평생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무시 당하면서 살아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평생 어느 학교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무시를 당하면서 살아 본 경험이 있습니까?

세상은 우리를 출신지역, 인종, 민족, 경제력, 학력, 외모 등에 따라 차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우리가 ‘우월한’ 인종으로 태어나거나 유력한 지역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하고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태어났더라면 멸시를 받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가의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별볼일 없는 동네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지만 가장 존재감 없고 무시 받는 지역에서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채 그 이름 ‘나사렛’을 평생 달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엘리트들이 아닌 갈릴리의 촌부(村夫)들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예수’가 아닌 ‘나사렛 예수’! 크리스천마저도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요즘 시대에 우리가 새겨 보아야 할 이름입니다.

1 개역성경은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라고 번역함으로써 ‘선지자’를 단수로 처리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선지자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다.

4 thoughts on “나사렛 사람 예수”

  1.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말은 결국 어느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또 다른 해석은 “나사렛”이라는 발음 자체가 히브리어로는 뜻이 branch 라는 말과 유사해서 이사야 11:1의 “There shall come forth a shoot from the stump of Jesse, and a branch from his roots shall bear fruit.” 에 나오는 “branch” 를 언어유희로 풀어내려는 마태의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는 군요. 아무튼 둘다 의도를 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 같네요.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우리 소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이 출생신분부터 시작되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면 알수록 놀랍습니다. 저희에게 계속 머리와 가슴을 흔드는 말씀 전해주세요.

    1. 댓글 달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마태가 사11:1을 인용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 해석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가서 사신 것이 어떻게 사11:1을 성취했는지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따릅니다.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