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본문: 마4:5-7

2015년 2월 8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목사

 

첫번째 시험에 실패하자 사탄은 예수님을 거룩한 성의 성전으로 데려 갔습니다. 즉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 갔습니다. 왜 성전으로 데려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탄이 시험을 하면서 인용한 시편 91편의 내용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 지존자를 거처로 삼는 자’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인 듯합니다(1, 9절). 즉 그 인용구절이 하나님을 믿어서 성전을 찾는 자들에 대한 약속이므로 그 약속을 인용하면서 시험하기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가장 적합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려 가서 그 꼭대기에 세웠는데, 이 꼭대기는 성전 외벽 중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탑의 지붕 모서리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이 곳은 그 탑 자체가 매우 높은 데다가 아래로는 기드론 골짜기가 펼쳐져 있어서 눈 앞이 아찔해지는 굉장히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 예수님을 세우고는 사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 “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니 하나님께서 너를 온갖 위험에서 보호할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시켜서 네 발이 기드론 골짜기의 돌들에 부딪쳐 다치지 않도록 하실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시험은 앞의 첫번째 시험에 이어지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했지? 그럼 네가 의지하는 하나님께서 너를 보호해 주실 것 아닌가? 그러니 한번 뛰어내려 봐라”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이 시험은 언뜻 보면 예수님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처럼 들립니다. 한번 뛰어 내려 보아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을 경험하면 믿음이 더욱 강해지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메시야로서 사역하는 동안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굉장히 많을 텐데 지금 뛰어 내려 보아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약속대로 메시야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앞으로 사역하는 데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탄이 빈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탄이 인용한 말씀은 성경에 분명히 있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 두번째 시험을 할 때 사탄은 참으로 영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번째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시는 것을 보고 사탄도 말씀으로 다시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인 것을 믿고 말씀으로 방어를 하는구나. 자, 그럼 이건 어때?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온갖 위험에서 너를 보호하신다고 말씀하셨거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그 말씀이 참이겠지? 그러니까 한번 뛰어 내려 봐.” 참 영리하지 않습니까? 성경말씀을 이용해서 공격하다니! 그러나 뒤에서 살펴 보겠지만 사탄은 성경말씀을 정확히는 인용했으나 그 뜻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도록 인용했습니다. 문맥과 관계 없이 그 구절만 딱 떼어서 인용함으로써 원래 뜻을 왜곡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일을 종종 합니다. 우리가 암송하고 있는 구절 중에는 그 뜻을 앞뒤 문맥과 관계 없이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구절들을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친절하게도 다른 사람에게 조언할 때에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문맥과 관계 없이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태도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면 사탄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습니다. 온갖 이단, 거짓 선지자, 거짓 목사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풀이해서 사람들을 유혹해 왔습니다. 성경을 문맥을 따라 쭉 읽어 나가는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은 그들이 성경을 교묘하게 그릇 해석할 때 ‘아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그냥 그들의 꾐에 넘어가고 맙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사탄이 인용한 성경말씀의 원래 뜻은 무엇일까요? 그 인용구절이 들어 있는 시편 91편을 잘 읽어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행동하시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고난을 자초하는 경우에도 보호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겸손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고난이 닥칠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가지고 사탄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셨으니 한번 뛰어내려 보라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뛰어내려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확인 행위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무서운 노림수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확인 행위를 하려고 마음 먹는 순간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이미 의심이 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이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하려고 마음 먹는 순간 이미 그 여인은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남편을 신뢰하고 있는데 뭐 어때? 한번 확인이나 해보지 뭐’라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을 먹는 순간 마음 한 켠에는 이미 의심이 싹 튼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린 의심은 시험을 통해서 상대방의 신실성을 확인했다고 해서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확인했으니까 안심이네. 그런데 그것은 어떨까? 그것도 한번 확인해 봐야겠네. 그냥 확인만 하는 거니까 괜찮아.’ 이렇게 다른 것을 확인하고나면 또 다른 것을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의심이 계속 자라가고 결국은 의처증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탄이 노린 것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시험에서 사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말고 자기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드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려 합니다. 그러면 사탄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그 믿음에 균열을 내서 예수님께서 메시야 사역을 못 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그랬지? 좋아 그렇게 해. 그런데 의지하려면 믿을 만한 분이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한번 확인해 봐. 나쁠 것 없잖아.”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1

이렇게 간교한 사탄의 시험을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경말씀을 인용해서 물리치십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한 것인데 그 말씀의 배경은 출애굽기 17장 1-7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광야를 좀 더 지나고 나니까 이번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자신들을 왜 이집트에서 끌어내서 목 말라 죽게 하느냐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겉으로는 모세를 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의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원망하자 모세가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말했고 성경기자도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라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사실은 우리를 여기에서 죽이려고 이집트에서 끌어내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면 어떻게 우리가 물이 없어서 죽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신실하심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했던 일을 직접 경험했던 모세는 새 이스라엘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에게 과거에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을 시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죄로 인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에 대적하여 인용한 말씀이 바로 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한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되돌려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임무를 띠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교묘하게 하나님을 시험하게 만드는 사탄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바로 모세의 말을 인용해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한편, 첫번째 시험과 마찬가지로 이 두번째 시험도 아담의 시험의 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을 축복하셔서 그들이 모든 과일을 따 먹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워서 성숙해지고 나면 따 먹도록 지금은 따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2 선악과를 따 먹으면 그들이 통치자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아직은 통치자가 되기에는 미성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탄의 꾐에 빠져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들이 선악을 알게 되어 자신처럼 될까봐 인색한 마음에서 금하신 명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선악과를 따 먹었고 그 결과 온 세상을 타락 가운데 빠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서 받으신 시험은 이 시험의 재판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두번째 시험은 새 이스라엘로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시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새 아담으로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두번째 시험은 메시야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섬기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시험이었습니다. 원래 시편 91편의 말씀은 메시야를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유혹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방식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서 그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메시야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메시야의 종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역해야 하는 메시야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죄였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들 즉 메시야들로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심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정말로 지키시는 분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이런 태도의 본질은 내가 삶의 주인이라는 의식입니다. 내 삶이 내가 생각한 대로 풀려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내가 최적이라고 생각한 시간에 취업이 되고 내가 최적이라고 생각한 시간에 승진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배우자가 행동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아이들이 커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일이 내가 생각한 대로 안 풀리면 하나님께서 과연 선하신 분인가 하나님께서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가 의심이 듭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우리 삶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종일 뿐입니다.

1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으셨겠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사탄의 말을 듣고 뛰어 내리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시편 91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을까요? 그러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거나 크게 다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어, 하나님의 약속이 틀렸네! 하나님은 약속을 안 지키는 분이네.”라고 선동했을 테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버리셨을 것입니다. 메시야로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경우에는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느니 예수님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느니 하는 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의 사기였겠지요.

2 이 해석은 미국 Theopolis의 성경신학 교수 James B. Jordan을 따랐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