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8: 기독교는 훈련이 필요없는가?

본문: 벧후1:1-11

2012년 1월 29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목사

 

디모데전서 4장 7-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훈련)하라. 육체의 연단(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인 베드로후서 1장 1-11절에서는 경건의 훈련에 힘쓰라는 내용이 나온 후에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이 두 말씀 다 우리가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을 하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경건을 위한 훈련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크리스천들은 경건을 위한 훈련에 그다지 열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건훈련에 대하여 경계하는 목소리조차 있습니다.1 경건훈련의 필요성을 성경이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데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저는 크리스천들이 경건을 위한 ‘훈련’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오해들을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많은 크리스천들 특히 칼빈주의를 열심히 따르는 사람들 중 일부는 우리에게 경건을 이룰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전적 부패’ 교리를 따라 우리의 지정의가 전적으로 부패했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경건을 이루는 데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많은 크리스천들은 경건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니 경건은 우리의 노력과 관계 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열심히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선물로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경건이 우리가 열심히 훈련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르냐고 항변합니다. 경건은 우리의 노력과 관계 없이 중생한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많은 크리스천들은 경건훈련의 효과에 의문을 가집니다. “하라는 대로 좀 해 봤는데 안 되더라. 죄와 싸우다가 실패만 했다.”고 말합니다.

경건훈련에 대한 이런 세 가지 오해에 대해서 오늘은 첫째와 둘째 것을 살펴 보고 세번째 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첫번째 오해 즉, 우리는 경건을 이룰 힘이 없다는 오해를 살펴 보겠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은 경건을 이룰 능력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경건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결국 경건의 능력에 있어서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지냅니다. 특히 일부 칼빈주의자들 중에 이런 수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주의의 ‘전적 부패’ 또는 ‘전적 무능력’ 교리를 심각하게 오해한 결과입니다. 칼빈주의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경건을 이루는 데 무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연인이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자연인 즉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고 그래서 성령님의 능력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경건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님의 능력이 안에서 역사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경건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주십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그의 신기한(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사도 베드로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신적인 능력으로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5-7절에서는 여러가지 훈련에 힘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요약하면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힘써 훈련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경건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훈련하면 경건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훈련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와 훈련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름 때문입니다.

이제 두번째 오해를 살펴 보겠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이기 때문에 경건은 훈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는 수양이나 고행을 통해서 인격을 기르지만 기독교에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이기 때문에 크리스천은 다른 종교인들처럼 수련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훈련은 행위종교에나 있는 것이고 은혜종교인 기독교에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점진적인 측면 즉 성화가 그런 훈련으로 얻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화는 그런 훈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 성령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은 특히 소위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교파에서 많이 합니다. 그들은 거듭난 사람도 ‘성령세례’를 받아야 더 영적이고 능력있는 신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성령세례는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임하시면서 이루어지는데 이 세례를 받으면 갑자기 거룩함의 정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심하게 말하자면 ‘한탕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로또를 맞아서 대박나고자 하는 생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성화가 그렇게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경건이 그렇게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칭찬받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중에 “수고했다 신실한 종아.”라고 칭찬하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눅19:17). 자신은 노력하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경건을 이루었는데 무엇을 보고 칭찬하신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얻는다는 말은 우리의 노력을 배제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단지 우리가 중생하고 우리가 성화를 위해 분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우리가 죄와 싸울 마음을 주시고 우리가 죄와 힘껏 싸울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분투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어도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종교나 기독교나 인격을 쌓기 위해 열심히 애쓰는 모습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크리스천은 그렇게 애쓰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인들은 그렇게 애쓰는 것이 순전히 자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은 훌륭한 인격을 구성하는 데 기본이 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가지 덕목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이 빠진 인격은 결코 훌륭한 인격이 될 수 없습니다. 핵심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인격이 잘 갖춰져 있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그를 좋아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장 같이 있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제일 보기 싫습니까? 교만한 사람 아닙니까? 자기 잘난 체하는 사람 아닙니까? 아무리 다른 면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잘난 체하면 상종하기가 싫어지지 않습니까?

한편 두번째 오해 즉 경건은 훈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오해와 관련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령인도에 관한 오해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인도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주시고 우리는 그 마음에 압도되어서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를 죄와 싸우는 문제에 적용한다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강하게 주셔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마음을 따르게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죄를 짓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강하게 주시는 것보다는 죄를 짓는 것이 옳지 않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 쪽에 가깝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도 여전히 우리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는 성향이 여전히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려고 할 때는 우리 마음 안에 치열한 싸움이 필수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욕구는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거스른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갈5:17). 이렇게 죄를 짓고 싶은 욕구와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맞서 있는 상태에서 우리의 욕구를 따르지 않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따르는 것이 성령인도라고 말합니다2(“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5:16, 18)).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감정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속마음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가식이 아니냐는 겁니다. 예를 들어 속으로는 어떤 사람을 싫어하면서 겉으로는 하나도 안 싫은 척 웃으면 그게 가식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과 가식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 안에 있는 마음과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을 진실하다고 말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가식적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맞을까요? 우리 주위에 못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지요. 이럴 때 어떤 사람이 그 사람에게 “나 너 싫어!”라고 말하면 속에 있는 마음대로 행동했으니 그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됩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 사람에게 싫은 내색을 안 하고 웃어 주면 속에 있는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고 있으니 그 사람은 가식적인 사람이 됩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가식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싫은 사람에게도 싫은 티를 안 내고 살지 않습니까?

겉과 속이 다르다고 모두 가식적이고 겉과 속이 같다고 모두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항상 겉과 속이 같은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미성숙한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겉과 속이 같습니까? 아이들은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티를 분명하게 내고 싫은 사람에게는 싫은 티를 분명하게 냅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행동할 때는 그게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게 미성숙하게 행동하니까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겉과 속이 똑같게 행동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진실한 겁니까? 아닙니다. 아이처럼 미성숙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과 가식의 구분은 겉과 속이 같으냐 다르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 구분은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느냐 아니면 상대방을 위해서 행동하느냐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구체적으로, 예배 후에 사람들이 교회를 나오는데 평소에 싫어하는 교인이 앞에서 넘어졌다고 합시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에게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 사람한테 달려가 그 사람을 정말 위하는 척 일으켜 준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므로 위선이고 가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속으로는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사랑하는 척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행동은 위선이고 가식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싫어하는 속 마음을 억누르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그를 위해서 그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위선이나 가식이 아닙니다. 겉과 속이 다르더라도 위선이나 가식이 아닙니다. 싫어하는 마음을 감추고 사랑의 행동을 한다고 해도 위선이나 가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이 진실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을 싫어하는 자기 감정에 충실하게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 그를 일으켜 주는 것이 더 진실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영으로 계신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에 맞게 행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마음과 우리의 행동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3

자 그럼 이 모든 논의가 자녀훈련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신명기 8장 5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과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discipline, 훈육)하듯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훈육)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성화를 위해 훈련하는 방법들을 아이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에 속한 능력을 주셨듯이 아이들에게도 그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도 경건을 이루어 낼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경건이 기도만 하면 성령님의 능력으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고 끊임없는 훈련이 있어야 이루어지듯이 아이들의 경건도 끊임없는 훈련이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한편 아이들을 훈련할 때 아이들의 마음이 안 바뀐 걸 어떡하냐고 하면서 기도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이 바뀌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하기 싫은 것을 시키는 것은 억지로 시키는 것이니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 안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욕구와 성령이 싸우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하고 싶어하는 것만을 시키면 아이들은 겉과 속이 같은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욕구에 굴복해서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미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훈련으로 우리 아이들 안에 있는 죄성을 꺾어서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자녀들이 싫어하더라도, 절제하고 인내하고 사랑하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 안에 있는 경건의 씨앗이 열매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1 경건훈련은 성경읽기, 기도, 금식 등의 종교적인 훈련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크리스천의 경건이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거룩함이다. 그러니까 절제하기, 화내지 않기, 이웃 도와주기,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기 등도 다 경건훈련이다.

2 곤히 자다가 아내가 아파서 끙끙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때 성령충만한 사람도 잠이 싹 달아나면서 아내를 간호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지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도 일어나기 싫고 더 자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아내를 간호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주시기 때문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것이다.

3 C. S. Lewis는 이것을 ‘그리스도로 분장한다’ 또는 심지어 ‘그리스도로 가장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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