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7: 자녀를 훈련시키지 않는 이유

본문: 잠29:15

2012년 1월 15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목사

 

요즘에 한국에서는 학교 폭력이 아주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도시에서 같은 반 친구들에게서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한 중학생이 자기 집 아파트 7층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이 사건이 유독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그 학생이 유서에 남긴 가해 학생들의 행태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학생들은 피해학생이 숙제를 대신 하게 하고, 게임을 대신 하게 해서 자신들 포인트 쌓게 하고, 아르바이트를 시키고는 수시로 돈을 뜯어 냈습니다. 요구한 것을 제 때에 해주지 않으면 수시로 온 몸을 구타했습니다. 한 마디로 잔인한 주인이 노예 다루듯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전깃줄로 목을 매어 개처럼 끌고 다니면서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그 학생이 자살한 것을 알고 나서도 태연하게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으면서 키득거렸습니다.

한국 학교는 이처럼 학생들의 품성과 사고방식이 심각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은 좀 다르지 않을까요? 저도 제발 많이 다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이런 문제는 기독교 가정의 자녀라고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한국 중학생의 95%가 욕을 일상적으로 한답니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카톨릭 포함해서 대략 1/3 정도입니다. 그려면 중학생들의 1/3 정도는 부모가 기독교인이겠지요. 그런데도 95%의 학생들이 욕을 한다는 것은 기독교인 부모를 둔 학생들도 대체로 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 학생들도 적지 않은 수가 학교에서 친구들을 괴롭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1/3이나 되는 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 기독교인의 자녀들마저 세상 아이들과 별 다를 바 없을까요? 답은 명백합니다. 부모들이 본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교회는 다니지만 불신자들과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사도신경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만 막상 세상에서 살아 갈 때는 불신자들과 똑같은 목표와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처럼 부와 권력을 추구함으로써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아이들에게 심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와 권력을 쥐고 나서는 그 힘을 불의한 데 쓰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지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약육강식의 논리를 체득하면서 힘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좋은 성적이든, 외모든, 스포츠든, 폭력이든, 폭력적인 말이든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나쁜 부모는 아닌 보통의 기독교인이라도 자신의 자녀들을 망치는 일은 흔합니다. 그러면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왜 문제학생이 될까요? 그것은 바로 부모가 아이들을 사실상 방치하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괜찮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자녀들을 기독교적으로 잘 키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교회를 데리고 다니기는 하는데 기독교적 훈육에 있어서는 거의 방치 상태로 놔 둡니다. 그 결과 자녀들이 불신 가정의 자녀들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왜 요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훈련시키지 않을까요? 이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오늘은 그 중 세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요즘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의 목표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앙생활의 목표가 천국(heaven) 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그 후의 삶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일단 예수님을 영접해서 천국 가는 표를 받아 놓았으니 그 후의 삶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남들처럼 삶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부와 권력과 명예가 성공한 크리스천의 뱃지로 여겨지는 세상이니 뭐 그리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려고 아둥바둥하겠습니까? 이러니 기독교인들의 윤리수준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손봉호 교수님이 자신은 개신교 역사상 지금의 한국 교회처럼 타락한 교회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겠습니까?

이처럼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목표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의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즉, “나라가 임하옵시며”). 아시다시피 복음서에서 하나님나라(kingdom of God)와 천국(kingdom of heaven)은 동의어입니다. 같은 것을 지칭하면서 마가와 누가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쓰고 마태는 ‘천국’이라는 표현을 쓸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천국이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표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하는 것이라니요.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에서 신자가 천국에 들어 가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말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마5:20)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처럼 말입니다. 이 구절들은 분명히 우리가 천국에 들어 가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지금 하나님 계신 곳을 천국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단지 ‘하늘(heaven)’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예컨대,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16:19),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14:2) 등).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천국이 가까왔다고 말씀하시거나(마4:17),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이미 임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마12:28). 그러니까 천국은 하늘에 있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이 땅에 이미 임하였고 또 임할 나라입니다. 불완전하나마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사역과 성령님의 강림으로 이미 임하였고 예수님 재림 때에 완전히 임할 나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느니라”와 주기도문의 “나라가 임하옵시며”에서 ‘임하다’라는 표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계신 곳이 천국이고 그 천국이 이 땅에 임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임하다’는 ‘강림하다’는 뜻이 아니고 단순히 ‘오다’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의 영어 번역도 그냥 “Thy kingdom come!”입니다. 그러니까 위에 있는 천국이 내려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임할 때 위에서 내려 오는 것은 하나님이나 성령님이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늘에 이미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려 오실 때 만들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늘의 원리로 이 땅 가운데 만드시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나라이며 주기도문에서처럼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자 이쯤 되면 우리가 그 동안 용어를 잘못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천국’이라는 말을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지칭할 때 씁니다. 그러나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천국은 이 땅에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해를 하면서 천국을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에 들어 간다’는 표현도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로 올라 간다’는 뜻으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의 목표가 ‘천국(heaven)’ 가는 것이 될 수밖에요.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의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나라(천국)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 지금 여기에서 하늘의 원리를 실천하도록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기에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도록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기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도록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요즘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오해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열심히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최초에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즉 칭의를 구원 자체로 오해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종교개혁의 모토를 오해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으니 믿은 후의 행위는 구원과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믿은 후에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예수님을 믿었으니 구원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고, 선행을 하는 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다만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과 관계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은 맞지만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경도 요즘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서 바울은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연단’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 뜻이 ‘시험을 통해 단련된 인정받는 성품(approved character, the quality of being approved as a result of tests and trials)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들은 그 단어를 ‘character’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인내는 인정받는 성품을 만들고 그 성품이 소망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연단을 통해서 형성된 인정받는 좋은 성품이 없다면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행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얼마나 비성경적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아이들을 기를 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생각에 따라 기르면 안 됩니다. 아이들 안에 좋은 성품이 생겨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좋은 성품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는 것은 지속적인 훈련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기독교인들은 성화가 이루어지는 수단을 오해함으로써 자녀들을 방치합니다. 그들은 믿으면 선한 행위는 저절로 따라 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칭의가 있으면 성화는 저절로 따라 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화를 위해 힘써 싸우지도 않고 자녀들을 열심히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는 오랫동안 묵상, 금식, 자선행위 등 성화를 위해 수행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N. T. Wright에 따르면, 서구사회에 지난 200년간 이런 성품계발 행위를 소홀히하게 만드는 사조가 일어났습니다.1 먼저 19세기에 낭만주의가 일어났습니다. 낭만주의는 그 동안 유럽사회를 지배했던 딱딱한 합리적 형식주의(규칙을 만들어서 의무로 지키게 하는 것)에 반발하여 내면의 감정과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행동을 중시했습니다. 규칙이나 체계가 아닌 생명, 사랑, 열정 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실존주의가 일어났습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조나 체계를 거부하고 우리 내면의 참 자아를 따라서 사는 것이 진짜 우리의 모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낭만주의와 실존주의의 사상은 기독교 내에도 깊이 침투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이 열망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 외침에 충실하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규칙이나 체계를 따르는 것은 자신의 참 자아를 잃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외부적인 제도나 규칙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기독교인들이 낭만주의나 실존주의가 주창하는 ‘규칙 배제’가 복음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우리는 율법의 행위와 관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면서 가르쳤던 것 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매여 있는 것을 꾸짖으면서 가르치셨던 것은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과 계명을 열심히 지키는 것과 관계 없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계명을 열심히 지키는 것과 구원이 분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계명을 열심히 지키는 것과 성화도 분리되었습니다. 계명준수와 구원이 분리되니 구원받은 사람한테 당연히 일어나게 되는 성화와 계명준수도 분리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칭의가 있으면 성화는 자연스럽게 따라 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노력이 없어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품을 계발하기 위해 분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하면 성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율법주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듭난 사람은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 16-18절을 인용합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신자는 좋은 나무이니 자연스럽게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신자는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3장 8-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이 구절에서 열매가 저절로 맺힌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열매를 맺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열매는 저절로 맺히지 않습니다. 농부가 물 주고 거름 주면서 땀을 흘려 가꾸어야 열매가 맺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아이들도 가만히 놔두면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훈련시키지 않고 가만히 놔두면 좋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29:15).

사실 아이가 거듭났다고 해도 훈련시키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은 건전한 상식에 속합니다.좋은 예가 바로 늑대소녀입니다. 1920년에 인도의 캘커타 근처 마을에서 늑대 떼와 함께 사는 두 여자 아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늑대처럼 네 발로 걷고 뛰었으며 늑대처럼 으르렁거렸습니다. 늑대처럼 시각과 후각도 매우 발달하였습니다. 음식은 냄새부터 맡았으며 고기나 우유만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8세와 15세로 추정되는 두 소녀에게 ‘카말라’와 ‘아말라’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들을 인간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 채 큰 아이 아말라는 1년 후에 죽었고 작은 아이 카말라는 9년 후에 죽었습니다. 카말라는 그 9년 동안 말을 배우기는 했으나 배운 단어는 고작 30개에 불과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생김새는 인간이었지만 인간보다는 오히려 늑대에 가까운 삶을 산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늑대들 사이에서 살면서 늑대로 훈련받은 결과 늑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도 거듭나서 신자가 되었더라도 신자가 되는 훈련을 받지 않으면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늑대소녀들은 태어났을 때 완전한 인간이었습니까? 당연히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잠재력도 인간 사이에서 인간이 되는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도 거듭날 때 성숙한 신자가 될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잠재력도 신자가 되는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의 아이들도 우리가 경건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결국은 불신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거듭날 때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단지 씨를 뿌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 씨가 저절로 자라서 저절로 꽃을 피우고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물을 주고 햇볕을 비춰 주고 거름을 주어야 그 씨는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자녀훈련에 온 힘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1 After You Believe,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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