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9: 훈련의 효과

본문: 갈6:7-9

2012년 2월 12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또 경건은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경건을 이루기 위한 훈련에 선뜻 뛰어 드는 것을 막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경건훈련이 효과가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누구든지 크리스천이 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보려고 노력하는 단계를 거칩니다. 성경도 열심히 읽어 보려고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해 보려고 합니다. 화가 나는 마음도 억눌러 보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도 베풀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웬걸 이것도 역시 세상의 다른 결심들과 마찬가지로 작심삼일로 끝납니다. 정말 열심히 해 보려고 했는데 그 노력이 한 두 달을 못 넘어 갑니다. 이렇게 실패하자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나 목사에게 물어 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니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 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마음을 다져 먹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다시 시도해 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그 시도가 오래 가지 못하고 또 실패하고 맙니다.

이런 거듭되는 실패에 이제 깊이 낙담하게 됩니다. 다시 시도하고 싶어도 또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엄두를 못 냅니다. 잔뜩 성공을 기대하고 시도했던 예전의 시도들이 결국은 실패로 끝나면서 실망만 안겨 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실망할까 두려워서 시도를 못합니다. 또다시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결국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것보다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합니다. 좋아하는 아가씨에게 교제를 청했다가 거절당해서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보다 멀리서 바라만 보면서 여전히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을 선호하는 젊은 청년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경건훈련을 할 때 따라 오는 고통도 훈련을 계속 시도하기 힘들게 만드는 큰 장애물입니다. 성화의 길은 동네 산책하듯 마음 내키면 하면 되는 ‘오락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노동’입니다(“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12:4). 그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싸움이기 때문에 연이은 싸움으로 피곤해져서 낙심하기 쉬운 전투입니다(“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12:3).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가서 겪은 일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 가서는 참으로 열심히 적과 싸웠습니다.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가나안 땅 곳곳을 누비면서 열심히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한 순간에 끝나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몇 십년을 계속 싸워야 하는 싸움이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스라엘 사람들은 타협을 하고 맙니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이제 좀 쉬자.” 이런 타협의 결과 이스라엘은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에게 사사시대 내내 시달립니다. 우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는 싸움도 일평생 이어지는 기나긴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평생 죄와 피흘리면서 싸울 생각을 하니 기가 딱 질립니다. 그 긴 기간 동안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싸움을 계속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와 적당히 휴전한 채 싸움을 중단하고 맙니다. 앞으로 이어질 기나긴 싸움을 생각할 때 오는 낙담이 아예 싸울 의지를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낙담에 빠진 사람들에게 N. T. Wright는 그의 책 After You Believe에서 신경과학계의 새로운 발견을 이용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1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뇌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구조가 바뀝니다. 예를 들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은 오른손보다 왼손이 더 큽니다. 오른 손은 활을 잡고 위 아래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반면 왼손은 손가락을 최대한 움직이면서 지판을 종횡무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지는 것은 왼손만이 아닙니다. 왼손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뇌부위도 같이 커집니다. 끊임없는 훈련이 뇌의 구조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는 훈련으로 뇌가 변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왼손을 지판에서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뇌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육체훈련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정신훈련도 마찬가지로 뇌의 구조를 변화시킵니다. 지적이지 않아서 책을 잘 못 읽던 사람도 끊임없이 책을 읽고 사고하는 훈련을 하면 책을 읽고 사고하는 뇌부위가 발달해서 다음부터는 책을 더 쉽게 읽을 수 있게 되고 사고력도 향상됩니다.

이런 원리는 도덕영역에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흉보는 일을 계속 하면 흉보는 일을 관장하는 뇌부위가 발달해서 다음부터는 무슨 일만 생기면 자동으로 남을 흉보게 됩니다. 반면에 내키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는 일을 계속 하게 되면 그 일을 관장하는 뇌부위가 발달해서 다음부터 남을 흉볼 일이 생겨도 자연스럽게 그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 허물을 덮어 주기가 처음보다 훨씬 더 쉬워집니다. 육체훈련이 몸의 근육을 발달시키듯이 도덕훈련이 “도덕근육”을 발달시키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육체훈련이 유려한 동작을 낳듯 끊임없는 경건훈련이 경건한 성품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건훈련이 효과없이 끝나는 헛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7-9). 운동선수가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훈련을 하면 그 성과를 거두는 것처럼 우리도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경건훈련을 하면 그 성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성품이 잘 바뀌지 않는 것을 볼 때 저를 질책하기 위해서 가끔 배우들을 생각합니다. 뛰어난 배우들은 한 배역이 주어지면 그 배역을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서 정말 치열하게 노력합니다. 자기가 맡은 배역과 똑같이 되기 위해 그 배역처럼 옷을 입고 그 배역처럼 잠을 자고 그 배역처럼 웃고 그 배역처럼 말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새 그 배우는 자신의 원래 모습은 사라지고 그 배역만이 남게 됩니다. 그래서 김명민, 한석규 같은 배우들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연기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뒷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얼굴 표정을 알 수 없는데도 그 사람의 슬픔이 온 몸에서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얼마나 자기 배역에 몰입을 했던지 뛰어난 배우들은 작품이 끝나고 나서도 한 동안은 그 캐럭터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배우들은 자기 힘만으로도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맡은 배역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품개조 전문가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전적으로 도와 주시는데도 매일 그 자리입니까? 그들도 그렇게 성공하는데 왜 우리는 거듭 실패만 합니까? 이런 실패에 대해서 우리가 변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배우들처럼 처절하게 노력해 봤습니까? 우리의 실패의 원인은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노력 부족입니다. 우리의 게으름입니다. 죄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욕망입니다.

한편 우리가 훈련을 통해서 덕을 계속 실천하면 그 덕은 우리에게 제2의 천성이 됩니다. 천성이 무엇입니까? 불시에 어떤 일이 닥칠 때 대비할 틈 없이 나오는 것이 천성입니다. 천성은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훈련으로 체화된 제2의 천성도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옵니다. “이런 일이 닥치면 이렇게 행동해야지.” 하고 굳게 다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 나옵니다. 이와 관련하여 N. T. Wright는 After You Believe에서 재미있는 사건을 하나 소개합니다.2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009년 1월 15일에 뉴욕의 한 공항을 이륙한 여객기가 곧 기러기 떼를 만났다. 그 기러기 떼는 순식간에 양쪽 날개의 엔진으로 빨려 들어갔고 엔진은 바로 고장이 나 버렸다. 갑작스런 사고에 기장은 지체없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바로 어디에 비행기를 착륙시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공항에 착륙할 수는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공항도 고장난 엔진으로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밑에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라 아무 데도 착륙할 곳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가까운 허드슨 강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착륙할 때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비행기가 뒤집히면서 부서져서 강에 가라앉게 되어 있었다. 착륙까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2-3분밖에 없었다. 이 짧은 시간에 기장과 부기장은 엔진을 끄고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바꾸고 방수시스템을 작동시키고 기체각도를 조절하는 등 십여 가지의 비상조치들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해냈다. 그 숨막히는 위급상황에서도 그들은 이 어려운 일들을 침착하게 진행해서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키고 모든 승객을 구해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극적인 사건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기장이 이런 일을 대비해서 수없이 연습한 노력의 결과일 뿐이었다. 그 끊임없는 훈련 덕택에 기장은 응급상황에서도 ‘자동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우리의 경건훈련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선을 행하기를 끊임없이 훈련하면 나중에는 이런 성향이 우리에게 제2의 천성이 되어서 불시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좋은 성품이 나오게 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좋은 성품이 나오게 됩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손양원 목사님을 아시지요? 1948년에 여수 애양원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던 손양원 목사님에게는 훌륭하게 자란 중학생 아들이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은 여순반란사건 때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동료 학생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 나갔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복수심에 불타는 대신에 계엄군에 잡혀서 사형 위기에 빠진 그 살해자를 구명운동을 해서 빼 내고는 자신의 양자로 삼고 결국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로 키워 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두 아들을 무참히 살해한 원수를 양자로 받아 들여서 사랑을 쏟다니요!

우리는 이런 일을 들으면 보통 그 놀라운 인격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 ‘놀라운’ 인격이 있기까지의 과정은 간과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이 놀라운 인격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분은 그 전에 이미 나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보면서 그런 성품을 계발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몸에서 온통 진물이 흐르는 그 나환자들을 먹이고 입히면서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왜 그런 일이 좋았겠습니까? 아마도 그만두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그 과정을 묵묵히 견디어 내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훈련을 해 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훈련된 사랑의 성품이 두 아들을 앗아간 원수에게도 ‘천성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운명은 죽어서 갈린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을 가느냐 지옥을 가느냐의 운명이 죽어서 갈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천국으로 가고 있거나 아니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천국에 합당한 성품을 만들어 가고 있거나 지옥에 합당한 성품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도 훈련으로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롬5:3-4). 선한 성품은 천국으로 이끌고 악한 성품은 지옥으로 이끕니다. 우리가 지금 선악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 악을 선택하면 악한 성품이 좀더 형성되면서 지옥에 가까와지고, 선을 선택하면 선한 성품이 좀더 형성되면서 천국에 가까와집니다. 한번 선한 일을 할 때마다 천국으로 한 걸음 내딛고 한번 악한 일을 행할 때마다 지옥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순간 천국행과 지옥행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아 넘겨서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했습니다. 이 선택은 그를 결국 지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선택이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전에 이미 악한 일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6절에 따르면 그는 돈궤를 맡은 자였는데 거기서 계속 돈을 훔쳐가고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이 악한 행위에서 형성된 악한 성품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음에 팔아 넘겼습니다. 우리도 지금 하는 악한 행동들이 쌓이고 쌓이면 그것이 결국에는 견고한 성품이 되어서 우리를 지옥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가 선택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우리를 천국 또는 지옥으로 이끕니다.

물론 어떤 선택은 되돌리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악한 죄를 하나 짓더라도 그 죄가 우리를 지옥행으로 결정짓지는 않을 것입니다. 회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은 사람을 결정적으로 지옥으로 끌고 가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은 우리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완악하게 해서 되돌이킬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선택이 그런 결정적인 선택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죄를 연이어 지음으로써 무뎌진 우리의 영혼은 비결정적인 선택과 결정적인 선택을 분별해내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도 그가 예수님을 판 선택이 그런 결정적인 선택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매순간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해야 합니다. 매순간 선을 행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언제 우리가 악한 성품이 굳어져서 가룟 유다처럼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순간 성품 계발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성품계발에도 때가 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써 좋은 성품을 계발하는 훈련은 어릴 때부터 해야 합니다. 성품계발은 나이 들어서보다 어릴 때가 훨씬 더 쉽고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진흙으로 만들기를 해 보신 적 있지요? 어린이는 물로 반죽을 한 진흙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거의 굳은 진흙과 같습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모양을 바꿀 수 없습니다. 바꾸려면 엄청난 고통이 따릅니다. 또 우리에게 참으로 실감나는 예를 들어 본다면, 나이와 성품 계발의 관계는 나이와 외국어 습득의 관계와 같습니다. 어릴 때는 외국어를 익히기가 쉽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외국어를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또 어릴 때 배운 단어는 잘 잊혀지지 않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힘들게 배운 단어조차도 쉽게 잊혀집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한 성품의 계발도 어릴 때 해야 더 효과적이고 더 오래 갑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뇌는 성장 과정에 있기 때문에 바꾸기가 쉽고 어른의 뇌는 이미 성장을 했기 때문에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운동이나 음악도 아직 뇌가 부드러운 어릴 때에 배우면 쉽지만 어른이 되어서 배우려면 어렵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현상을 운동이나 음악 등 인격과 도덕 밖의 영역에만 한정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품, 도덕성,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뇌가 부드러운 어릴 때는 이런 것들을 위한 훈련의 효과가 큽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훈련의 효과가 훨씬 더 작습니다. 경건 훈련을 어릴 때 했을 때의 효과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22:6).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녀들을 경건하게 키우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과 그 성공에 대한 확신을 주셔서 우리의 아이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양육되기를 소망합니다.

1 N.T. Wright, After You Believe, 37-39.

2 N. T. Wright, After You Believe,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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