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17: 사춘기의 자녀교육법 1

본문: 잠20:5

2012년 7월 29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지난 시간에 사춘기는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독립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점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춘기 자녀를 둔 많은 부모들이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한국의 부모들이, 더 정확히는 한국사회가 어른이 되는 기간으로서의 사춘기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캐나다에 와서 살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서양의 20대가 한국의 20대보다 더 성숙하다는 점입니다. 생각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대체로 서양 청년들이 더 성숙합니다. 이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사춘기 때의 교육방식과 환경에 관한 두 사회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양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사춘기 때 공부만 시키지 않고 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도 하고 음악도 하고 스포츠도 하고 캠프도 가고 봉사활동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아이들은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자신의 가치관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러나 한국 아이들의 사춘기는 이와 굉장히 다릅니다.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기간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아이들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학교와 학원에서 공부에만 매 달립니다. 그러니 다른 일은 할 여유도 없고 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다양한 일을 접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만들어 갈 기회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대학입시 공부 시스템에는 인격수련에 도움이 되는 과정이 없습니다. 주입식 교육인지라 가치판단을 필요로 하는 일도 없고 자신이 독립적으로 뭔가를 하는 일도 없습니다. 오로지 지식 습득만이 있을 뿐입니다. 정작 자신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경험은 부모가 대신 해 줍니다. 정신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새롭게 경험하는, 또는 새롭게 인식하는 일들에 대해서 성숙한 어른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데 어른들과 대화를 할 시간도 없습니다. 부모조차도 자식이 그런 대화를 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 더 푸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춘기를 보내니 한국의 20대가 정신적으로 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20대 초반 아이들은 몸은 성인이 되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사춘기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10대 때 겪었어야 할 사춘기를 이제서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캐나다로 이민 왔다고 하더라도 한국 부모의 왜곡된 교육열은 별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녀교육의 목표는 자식들을 명문대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과 별 차이 나지 않게 키우고 결국은 미성숙한 20대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지 말아야 합니다. 사춘기에는 공부만 시키지 말고 어른이 되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사춘기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어떻게 우리의 아이들을 성숙한 어른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성숙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숙하다는 것은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할 뿐만 아니라 옳은 것 중에서도 적절한 것과 부적절한 것을 분별하고 더 나아가서 적절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언제 하는 것이 좋은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배기팬츠(baggy pants) 스타일로 옷을 입는 것이 옳습니까 그릅니까?1 다시 말해서 그렇게 입는 것이 죄입니까 아닙니까? 분명히 죄는 아닙니다. 다만 바지를 너무 내려 입으면 팬티가 드러나기도 하고 단정하게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배기팬츠 스타일은 부적절한 옷차림입니다. 그러면 배기팬츠를 내려 입지 않았다고 그런 바지를 아무 때나 입어도 됩니까? 예배 때나 결혼식장에서 그런 옷을 입어도 됩니까? 아닙니다. 그런 옷차림은 예배 때는 하나님께 결혼식장에서는 신랑신부와 그 가족들에게 무례한 옷차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춘기의 아이들을 키울 때 발생하는 문제는 대체로 이와같은 것들입니다. 배기팬츠를 입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같은 문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춘기 자녀들을 키울 때 자녀들과 주로 씨름하는 문제는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고 적절하냐 부적절하냐의 문제입니다. 도덕성 문제가 아니고 적절성 문제입니다. 이것이 사춘기 자녀들을 키우기가 어린 자녀들을 키우기보다 훨씬 어려운 이유입니다. 어릴 때는 자녀들을 대체로 흑백논리로 가르치면 됩니다. 그러나 사춘기에 있는 자녀들은 흑백논리로 가르치면 안 됩니다. 이제는 흑과 백 사이에 무수히 많은 회색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회색은 어떻게 보면 검은 색이고 어떻게 보면 하얀 색입니다. 청바지는 결혼식 때 입으면 부적절하고 신혼여행 때 입으면 적절합니다. 말하자면, 청바지 자체는 회색인데 이것을 결혼식 때 입으면 흑이 되고 신혼여행 때 입으면 백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적인 예이고 실제로 우리가 살아 가면서 또 사춘기의 자녀들을 키우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들이 굉장한 지혜를 필요로 하는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춘기의 자녀들을 잘 키우려면 우리 자신부터가 지혜로와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지혜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흑백논리로 윽박지르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당연히 집 바깥으로 돌게 됩니다. 자기의 문제에 대한 답을 부모에게서 구하지 못하니 당연히 부모와의 대화는 줄어 듭니다. 늘 아주 피상적인 대화만이 오가게 되고 이렇게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를 잘 지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 한다고 지혜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지혜의 보고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좋은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또 지혜로운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도의 사람, 책의 사람, 생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그러면 사춘기의 자녀들을 잘 키우는 지혜로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질풍노도의 시기를 달려 가고 있는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사춘기 자녀들을 키우는 데 있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춘기 자녀들은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수많은 부모들이 이 원리를 망각하거나 소홀히해서 사춘기 자녀교육에 실패합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어린이가 아니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어른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아직 완전한 어른이 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 어른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미성숙합니다.2 그러나 그들은 어른이 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많은 면에 있어서 어른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의견이 다른 어른들에게 우리 의견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최대한 예의바르게 그들을 대화로 설득합니다. 그래도 설득이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말을 안 듣는다고 화를 냅니까? 아닙니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면서 기다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춘기 아이들을 대할 때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성숙 정도에 따라서 아이들을 다르게 대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숙해 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안에 율법이 내면화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또 누가 통제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바른 삶을 살아 가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숙과 자율은 정비례의 관계에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더 자율이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점점 더 자율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완벽하게 통제를 하다가 자랄수록 점점 더 통제는 줄이고 자율을 점점 더 부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이 원리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애가 뭘 알아 듣겠냐고 생각해서 통제를 별로 안 하다가 아이들이 자란 후에야 통제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통제를 사춘기까지도 지속시키려 합니다. 그러니까 바른 방법은 통제에서 자율로 옮겨 가는 것인데 거꾸로 자율에서 통제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그래서 자율을 갈망하고 있는 사춘기의 아이들이 이런 통제를 받아 들이겠습니까? 자율을 쟁취하기 위해 부모와 투쟁하겠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사춘기 자녀교육의 기본 원리 중 하나가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가 모든 것을 대신 해 줍니다. 음식도 대신 골라 주고 옷도 대신 골라 주고 읽을 책도 대신 골라 줍니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커서도 그런 결정을 대신 내려 주면 아이들은 판단력과 지혜를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지 않으면 모든 일을 부모에게 계속 의존하는 미숙한 어른으로 자라게 됩니다. 하찮은 들짐승들도 이렇게 키우는 부모들보다는 낫습니다. 호랑이나 사자가 새끼를 키울 때 보면 새끼가 어릴 때는 사냥한 동물을 죽여서 갖다 줍니다. 그러나 새끼가 좀 자라면 이제는 동물을 약간만 다치게 해서 잡아다 줍니다. 그 살아서 도망다니는 동물을 직접 잡아서 먹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더 자라면 이제는 같이 진짜 사냥을 나갑니다. 우리들도 사춘기 아이들을 키울 때 이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다 해 주지 말고 아이들이 직접 해 볼 수 있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자랄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에게 전적인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 따로 독립해 나갈 때입니다. 사춘기 아이들은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잘못 판단해서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어미 사자가 한 번 물어서 타격을 입힌 사냥감을 새끼에게 물어다 주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어미는 새끼가 이 약한 사냥감을 완전히 제압해서 사냥하는 기술을 익혀야만 진짜로 사냥터에 데리고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사춘기 아이들이 작고 위험 부담이 적은 일부터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그 일에 실패하면 왜 실패했는지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더 성장하게 만들어서 작은 일을 능숙하고 지혜롭게 해 낼 때 비로소 더 큰 일을 맡겨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춘기 때는 용돈을 몇 십만원씩 주면 안 됩니다. 먼저 몇 만원씩 주면서 그 돈을 지혜롭게 잘 쓰는 것을 훈련시킨 다음에 용돈을 더 늘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춘기 때는 아이들을 어릴 때처럼 통제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어른처럼 완전히 자율을 허용해서도 안 되고, 기본적으로 자율을 허용하면서 아이들이 주어진 자율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만 자율을 책임감 있게 지혜롭게 잘 사용하면 그제서야 더 큰 자율을 주어나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춘기 아이들을 양육하는 주요 수단은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많은 사람들이 대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큰 착각을 합니다. 상대방과 대화한다고 해 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하고는 “아, 대화 한번 잘 했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그냥 자신의 스트레스 풀기입니다. 그런데 사춘기 자녀와의 대화를 이런 식으로 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자녀와 대화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는 그 시간을 일방적인 강의나 설교로 채웁니다. 이런 일은 자녀가 무엇인가 잘못했을 때 더 두드러집니다. 자녀가 한 일이 왜 잘못인지 또 어떻게 해야 했는지 등을 자세히 나열합니다. 물론 이런 태도는 잘못한 자녀에게 냅다 화부터 내는 부모보다는 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부모도 자식들을 화나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Papa, don’t preach!”라는 노래까지 있겠습니까? 사춘기 아이들은 이미 머리가 많이 커진 아이들이라 일방적으로 교훈을 늘어 놓는 부모에게는 반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화를 내면서 반발하지 않더라도 속은 불만과 반발심에 부글부글 끓습니다. 특히나 사춘기 아이들은 자기를 실제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고 여기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부모의 말을 새겨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부모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데 부모의 일방적인 설교를 듣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사춘기 아이들과 대화할 때는 진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기보다 아이들이 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설사 틀린 말을 하더라도 바로 반박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도 바로 꾸짖지 말고 최대한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태도로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 마음 속 깊이 들어 있는 마음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 깊숙히 흐르는 마음의 동기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잠20:5). 그렇지 않고 야단부터 치면 결코 아이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낼 수 없고 결과적으로 아이들의 행동과 마음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이들의 마음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바른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너 왜 그랬어?” 라고 물으면 안 됩니다. ‘왜?’라는 질문 안에는 정죄의 뉘앙스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으면 아이들은 바로 “제가 뭘요?” 라고 반응을 합니다. 참 우리 말이 재미 있죠? 부모의 말은 이유를 묻고 있는데 자녀의 말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국어를 못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행동의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고 행동을 정죄하고 있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 왜 그랬어?” 라고 물을 때 우리가 실제로 뜻하는 바는 “너 그 나쁜 짓 했지?” 라고 다그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했어요?”라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이들의 마음을 끌어낼 때 그런 정죄의 뉘앙스가 풍기는 표현을 쓰지 말고 다른 표현을 써야 합니다. 이를테면, “그런 일을 한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구나.” 라든지 “네가 그 일을 할 때 어떤 느낌이었지?” 라든지 “네가 그런 일을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떤 느낌을 가졌을 것 같니?” 같은 표현 말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반발하는 대신 자신의 마음 속 동기를 드러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사춘기 자녀들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버지가 슈퍼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순진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기는 깡패들하고 1대 10으로 싸워서 이겼다고 해도 아이들은 믿습니다. 그러나 사춘기에 이른 아이들은 부모에 대한 그런 환상에서 깨어납니다. 그렇게 위대해 보였던 아버지도 이제는 보통 아버지일 뿐입니다. 이렇게 부모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현실을 바로 보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부모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자신은 완벽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없는 것처럼 항상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자신은 실패한 일이 없는 것처럼 항상 실패를 꾸짖기만 하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은 반드시 빗나갑니다. 부모의 가르침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든지 아니면 속으로 그 위선을 비웃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완벽한 척하는 것보다 자신의 허물과 실패를 진솔하게 보여 주는 것이 더 낫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죄와 실패로 인해 괴로와할 때 자신의 부족함과 결함을 솔직히 나누면서 자신이 아이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같은 죄인이요 같은 실패자로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같이 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부모의 훈계를 질책으로 듣지 않고 공감과 격려로 듣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사춘기 자녀들은 부모를 인생의 훌륭한 조언자로 여기고 따르게 되고 부모는 인생의 귀한 동반자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1 통이 넓은 바지로서 요즘 젊은이들이 허리 밑으로 내려서 많이 입는다.

2 정확히 말한다면 사춘기의 아이들은 어른이면서 어린이이고 어린이이면서 어른이다. 그들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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