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18: 사춘기의 자녀교육법 2

본문: 골2:16-17

2012년 8월 12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각 가정에는 고유의 문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가족문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을 거쳐 오랫동안 가족 구성원들이 살아 오면서 쌓아 온 결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가족문화는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뼛 속 깊숙이 새겨지면서 가족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다고 받아 들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다른 가족문화를 접하게 되면 갈등이 불거집니다. 서로 다른 가족문화가 충돌하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과 충돌은 인생 경험이 많은 어른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적당히 선을 긋고 적당히 타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그래서 아직 삶의 경륜을 갖추지 못한 사춘기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큰 문제로 다가 옵니다. 자기 집의 문화와 판이하게 다른 다른 집의 문화를 받아 들여야 할지 거부해야 할지 아니면 인정만 하고 관여하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면 이런 혼란을 사춘기의 아이들이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가정의 법(house rule)과 하나님의 법(God’s rule)을 구분할 수 있게 해 주면 됩니다.1 가정의 법은 어느 가정에서 하나님의 법을 실현하는 구체적 수단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보기 위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저의 집에서는 식사할 때 가능한 한 말을 하지 않도록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의 집은 식사할 때는 모두들 침묵을 지켰습니다. 부모님께서 이렇게 식사 때 말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신 이유는 입에 음식이 있는 채로 말을 하면 그 음식물이 보이거나 밖으로 튀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같이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큰 실례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가정의 법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법은 무엇일까요? 가정의 법은 식사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은 식사 예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법은 원리이고 가정의 법은 그 원리를 실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의 법은 하나님의 법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지 가정의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다른 가정의 문화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한 가정의 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예를 든다면 입에서 음식물이 안 보이게 하거나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게 함으로써 식사예절을 지키는 수단에는 식사 때 말을 하지 않는 것 외에도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즐겁게 교제를 나누면서도 식사 예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즉, 입 안에 음식이 남아 있으면 그 음식을 다 먹고 나서 말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의 가정의 법이 있으므로 다른 가정의 법을 접했을 때 그 방식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식사시간에 침묵을 지키는 자기 가정의 법에 매몰되어서, 다른 집에 초대 받아 가서 식사를 할 때 말을 많이 하는 문화를 비판하거나 사람들을 자기 집에 초대해 놓고 식사 시간에 말을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지 가정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법과 하나님의 법의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기들은 어릴 때 자주 웁니다. 그런데 집마다 이를 대처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어떤 집은 아기가 울면 가서 안아서 달래 줍니다. 엄마 없이 울고 있는 아기가 안쓰러워서 안아 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떤 집은 아기가 울어도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젖었거나 몸이 아픈 경우 등 정말 아기가 필요가 있어서 우는 게 아니면 안아 주지 않습니다. 명백한 이유가 없는데도 가서 안아 주면 버릇 나빠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정의 법은 아기가 울 때 대처하는 서로 다른 방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은 아기를 사랑으로 훌륭하게 키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기를 훌륭하게 키우는 한 아기가 울 때 가서 달래 주는 방식과 울게 내버려 두는 방식 중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기를 안아서 달래 주는 집은 아기가 울게 내버려 두는 사람들을 비정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기의 이기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조금이라도 자기 성에 안 차면 울어 대는 그 이기성 말입니다. 그래서 울게 내 버려 두는 것이 그 죄성을 고치는 훌륭한 방법일 수 있다는 점을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한편 아기가 울게 내버려 두는 집은 안아서 달래 주는 사람들을 아기를 응석받이로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기도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라는 점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외롭고 두려울 때 누군가 와서 포근히 안아 주면 위로가 되듯이 아기들도 엄마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실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가정의 법이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우리 아이들, 특히 사춘기 아이들에게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 온 가정의 문화는 어느 새 아이들의 뇌리에 박혀서 절대적인 법칙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의 가정의 법이 하나님의 법이 되어서 다른 사고 방식과 다른 생활방식을 잘 용인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한 어떤 방식의 삶을 추구하든 인정하고 받아 들이도록 키워야 합니다. 어릴 때는 가정의 법이 절대적인 줄 알고 크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법이 절대적이고 가정의 법은 하나님의 법을 실현하기 위한, 그리고 하나님의 법으로 가는 징검다리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교육방식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원리입니다.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가정의 법과 하나님의 법’의 원리에 따라 양육하셨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기독교와 유사기독교 종교에서는 구약의 의식법들(제사법, 절기법, 음식법 등)을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적용해야 하느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래서 안식교는 여전히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유대교는 여전히 대부분의 의식법들을 지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약의 의식법들을 더 이상 지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가리킨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실체)은 그리스도의 것이라.” (골2:16-17). 구약의 의식법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질 일들을 가리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할례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우리의 죄와 수치가 끊어져 나갈 것을 미리 보여 주었습니다. 유월절 때 양을 잡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성전으로 오실 것을 미리 보여 주었습니다. 구약의 의식법들은 실체인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구약의 의식법들은 본질인 그리스도의 사역들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의 의식법들은 가정의 법에 비유할 수 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실체이고 구약의 의식법은 그림자이듯이 하나님의 법이 실체이고 가정의 법은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가 본질이고 구약의 의식법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듯이 하나님의 법이 본질이고 가정의 법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구약의 의식법이 우리를 훈련시켜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듯이 가정의 법도 우리를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법에게로 이끕니다. 구약의 의식법이 이스라엘에만 적용되었듯이 가정의 법도 한 가정에만 적용되고, 그리스도가 모든 나라에 적용되듯이 하나님의 법도 모든 가정에 적용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율법을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이 잘못이었듯이 우리가 우리 가정의 법을 다른 가정에 강요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실 구약의 의식법은 이스라엘에만 적합한 법이었습니다. 한 가정의 법을 다른 가정에 적용하기 곤란한 것처럼 다른 나라에서는 적용하기 곤란한 법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예를 들어 살펴 보겠습니다. 성막과 성막의 기구들과 제사장에게 바르는 거룩한 기름의 재료 중 하나는 감람유 즉 올리브 기름이었습니다(출30:22-33). 그러나 올리브 기름은 다른 나라, 예컨대 한국에서는 나지 않는 기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 관련 의식법은 한국에는 적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절기는 기후가 다른 다른 나라에서는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따르면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인 초실절에는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 앞에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레23:9-14). 그런데 유월절은 3월이나 4월에 옵니다. 그러면 한국에서 3월이나 4월에 보리를 수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같은 나라에서는 초실절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에는 양을 잡아서 먹게 되어 있었는데 옛날에 한국에 양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같은 나라에서는 유월절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의식법들은 전 세계인들이 지킬 수 있는 보편적인 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특정 지역에서만 지킬 수 있는 법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한 지역에만 머물러 있던 시대에만 적용될 수 있는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모든 나라에 퍼져 나가는 신약시대에는 적용될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볼 때 자신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었던 의식법의 틀을 깨고 나와야 했습니다. 한 가정의 법이 모든 가정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으므로, 사춘기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서 자신의 가정의 법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결국에는 자신들의 의식법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암시는 왕국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문둥병에 걸렸던 아람의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말을 따라 요단강에서 몸을 씻어 문둥병이 낫고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람의 장군이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인이 되는 대신에 아람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구약신자의 필수요소인 제사도 드리지 못하고 절기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정결규례도 못 지켰을 것입니다. 구약의 의식법들을 거의 지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 밖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의식법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도 의식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간 것입니다. 이방제국의 수도인 바벨론에서는 당연히 자신들의 의식법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나 의식법의 핵심인 성전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의식법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능한 경험을 자신들이 직접 한 것입니다.

왕국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전까지는 인간의 성장 단계로 치자면 사춘기입니다. 따라서 바벨론 유수 사건은 사춘기 아이들이 다른 집에 놀러 가서 그 가정의 법을 경험한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주로 자기 집에서 자기 가정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지만 가끔씩 다른 집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이 때 다른 집이 자기 집과는 다른 가정의 법을 지키면서도 가정이 잘 유지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런 인상적인 경험은 자기 집의 법만이 옳다는 생각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바벨론이 망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 와서 기존의 의식법들을 지키면서 살았지만 돌아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이방 땅에서 기존의 의식법 특히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지키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돌아 온 사람들 못지 않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목숨처럼 지켰던 의식법이 궁극적인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기존의 의식법들을 성취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의식법 준수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의식법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의식법들이 그 동안 가리켜 왔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때(기원 후 30년)부터 의식법의 상징인 성전이 파괴될 때(기원 후 70년)까지는 유대인들이 기존의 의식법을 지키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도 믿는 과도기였습니다. 자신들에게만 적용되는 구약 의식법에서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신약의 새로운 계명들로 옮겨 가는 과도기였던 것입니다. 이 시기는 사춘기를 벗어나서 성인이 된 사람이 자신의 가정의 법을 지키면서도 모든 가정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대응됩니다.

마지막으로 기원 후 70년 후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의 의식법을 완전히 버리고 모든 인류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기독교의 원리들만을 따라야 합니다. 그 동안 자신들의 삶을 본질적으로 규정해 왔던 의식들이었지만 이제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으므로 옛 의식은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자신들의 삶을 재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인이 된 후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한 사람은 기존의 자기 가정의 법을 버립니다. 이제 자기 가정의 법이 가리켰던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기존의 가정의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그 가정의 법의 본질인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게 됩니다. 모든 가정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하나님의 법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새로운 가족문화를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가정의 법과 하나님의 법을 구분함으로써 가정의 법의 역할과 한계를 알게 되면 우리의 자녀들은 훌륭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가정의 법은 각 가정에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법으로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가정의 법을 절대시하고 않고 다른 가정의 법도 존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정의 법과 하나님의 법을 구분하지 못하면 편협하고 독선적인 사람들이 됩니다. 현재의 유대인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자신의 가정의 법에 갇혀 사는 것처럼 구약의 종교와 문화에 갇혀 삽니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종교와 문화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시키려 합니다. 선민의식을 가지고 다른 민족들에게 우월감을 가집니다. 우리가 우리 사춘기 아이들에게 가정의 법과 하나님의 법의 구분을 잘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도 유대인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가족문화를 진리로 우상시하면서 다른 집의 문화는 비진리라고 무시하게 됩니다. 이런 경향은 그들의 삶의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쳐서 다른 교단, 다른 문화, 다른 민족을 배척하는 사람이 됩니다. 가장 무서운 죄인 교만의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역사하셔서 가정의 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법을 볼 줄 아는 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이렇게 ‘가정의 법’과 하나님의 법’을 구분하는 것은 더글라스 윌슨 (Douglas Wilson)에게서 빌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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