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15: 유아기와 아동기의 자녀교육법

본문: 엡6:1

2012년 6월 17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인간의 발달 단계를 말할 때 보통 출생 후 만6세까지의 기간을 유아기(幼兒期)라 부르고 초등학교 기간을 아동기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오늘 다룰 주제는 출생 후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즉 출생 후 사춘기 전까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오늘 그 방대한 내용을 다 다룰 수는 없으므로 이 기간에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순종 가르치기’와 ‘성품 계발’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훈육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부모가 아이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가 부모에게 순종하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1 어린 아이들은 참으로 예쁩니다. 특히나 방긋방긋 웃는 아이들은 말 그대로 천사같습니다. 이렇게 예쁘니 하는 짓이 모두 다 귀엽고 예쁘기만 합니다. 떼 쓰는 것도 귀엽고 짜증내는 것도 귀엽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훈육을 시작해야 할 시기를 놓쳐서 결국 ‘미운 네 살’과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훈육을 제대로 하지 않은 잘못은 간과한 채 아이 탓만 합니다. “우리 아이는 고집이 세다”는 둥, “이렇게 키우기 힘든 아이는 처음 봤다”는 둥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키우기 더 힘든 아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키우기 힘들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부모가 제대로 못 키운 데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순종을 가르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아이는 가만히 두면 모두가 다 키우기 힘들게 자랍니다. 모든 아이들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 안에 권위에 불순종하는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죄성은 가만히 두면 무시무시하게 자라나서 결국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모든 권위에 불순종하는 괴물로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떤 권위있는 가르침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교육의 출발점은 ‘순종 가르치기’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 이후의 어떤 훈육도 안 먹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니까 어떤 거창한 개념을 떠 올려서 훈육을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집 피우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특별히 문제 될 게 없는데 자기가 싫은 것을 안 하려고 고집을 피웁니다. 특정 음식을 안 먹으려고 고집을 피우고 특정 옷을 안 입으려고 고집을 피웁니다. 이럴 때 아이에게 져서 아이의 고집을 들어 주면 아이는 다음부터 더 자기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자기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가 아이를 다루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조그만 것 하나 시키는데도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해야 합니다. 이제는 부모가 권위자로서 시키는 입장이 아니라 애원하는 입장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현상이 크리스천에게는 더 큰 문제로 나타납니다.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아이는 하나님께도 불순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부모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모를 꺾어서 자기 맘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무슨 권위인들 무서워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우스운 부모가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면 아이가 순종하겠습니까? 큰 권위에 대한 순종은 작은 권위에 대한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권위에 대한 순종은 보이는 권위에 대한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부모님에 대한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권위체계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 군대 상관, 직장 상사 모두 다 권위를 가진 존재입니다. 집에서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아이는 커서도 이런 권위들에 순종하지 못해서 사회 부적응자가 되고 맙니다.

한편 순종의 의미를 약화시킴으로써 아이들이 결국 불순종하게 만드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된 순종은 ‘반항하지 않고,’ ‘지체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부모의 지시에 따르는 것인데, 사람들이 이 기준을 약화시켜서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불순종하도록 부추깁니다. 먼저, 부모가 무언가를 지시했을 때 반항하는 것은 당연히 순종이 아닙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반항하는 아이를 그냥 넘길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반항이 교묘할 때는 부모들이 혼동스러워집니다. 부모가 무언가를 시킬 때 “왜요?”라고 질문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떤 부모들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낍니다. 요즘처럼 아이들의 지적 발달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질문할 때 그 질문에 대답해 주는 대신 혼내면 아이들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러면 아이들의 지적 호기심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요?”라는 질문은 현상과 법칙에 대해서 해야지 부모의 지시에 대해서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단다”라고 말했을 때나 “옷은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는 아이가 “왜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옷 단정하게 입어라”라고 말했을 때는 “왜요?”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두 예는 아이가 궁금해서 물어 본 것이지만 마지막 예는 아이가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부모의 지시에 따르기 싫어서 물어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궁금해서 물어 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이유를 묻는 태도는 권위자에게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이유를 알아야 순종하겠다는 것은 권위자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애완견이 주인이 시키는 것을 이해해야 말을 듣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가 무언가를 지시했을 때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나중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 또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은 대체로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숙한 신앙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부모의 지시에 순종하는 데서부터 얻어집니다.

다음으로 부모가 말한 즉시 행동하지 않으면 순종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이 말을 바로 듣지 않으니 아이들이 말을 들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시간을 좀 더 줍니다. “너 셋 셀 때까지 안 하면 혼난다! 하나, 둘, 둘의 반, 둘의 반의 반…”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에게 이미 지고 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눈치가 빠르고 영리합니다. 그래서 엄마가 으레 숫자를 셀 줄을 알고는 숫자를 세는 엄마의 눈치를 보다가 엄마가 매를 들려고 하기 직전에야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순종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엄마를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회사든 군대든 아랫 사람에게 일을 시켜 놓고 숫자 세는 것 보셨습니까? 참된 순종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말을 바로 듣지 않으면 우리는 바로 징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모의 말에 즉시 행동하지 않고 변명을 하는 것도 순종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변명거리가 많은지요? 무슨 일을 시키면 수만가지의 변명거리가 나옵니다. 안 아프던 배도 갑자기 아프고 멀쩡하던 머리도 갑자기 어지러워지고 없던 숙제도 갑자기 생겨 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는 뻔히 보이는 변명들을 이렇게 늘어 놓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이렇게 변명하는 것을 엄히 혼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무슨 일이든 늘 변명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그게 변명인 것이 훤히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한편 아주 간혹 아이가 진짜로 부모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아이가 부모에게 사정을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다스림은 무자비한 독재가 되어 버립니다. 어떤 호소도 통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권위를 권위주의로 이해하게 되고 그런 권위는 타파해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든 권위에 대해 반항적이 되면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도 권위자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억압적이고 무자비한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아이의 정당한 요청을 들어 줘야 합니다. 간혹 지시를 철회하는 것이 자기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는데 그것은 굉장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잘못된 지시나 결정이라면 곧바로 철회하는 것이 오히려 권위를 유지하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아이는 자신의 사정까지도 살펴 주는 부모에게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앞으로 부모의 지시에 더 잘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의 사정을 들어 줄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지시를 바로 따를 수 없는 합당한 사정이 있다고 해도 먼저 부모의 지시에 순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들에게 레고 조각이 널려 있는 자기 방을 치우라고 했을 때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은 채, “그런데 엄마, 곧 항공모함이 완성되니까 그 후에 치우면 안 돼요?”라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가 일단 일어서서 엄마 말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그런데 엄마, 곧 항공모함이 완성되는데 그 후에 치워도 될까요?”라고 말하게 해야 합니다. 전자는 자신의 입장을 우선시하는 태도이고 후자는 엄마의 지시를 우선시하는 태도입니다. 전자는 자신의 놀이가 중요하기 때문에 엄마의 지시에 불응할 수도 있다는 태도이고 후자는 엄마의 지시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놀이를 중지할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전자는 온전히 순종하는 태도가 아닌 반면에 후자는 온전히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한편 순종과 관련해서 우리가 반드시 고쳐야 할 아이들의 나쁜 버릇은 징징거리기입니다. 아이가 징징거리는 것은 보기에도 안 좋지만 본질적으로는 부모의 다스림에 대한 불평불만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부모의 권위에 대한 불신과 도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대로 두면 아이가 나중에 불평주의자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 처하든 항상 불평불만을 일삼게 됩니다. 비록 좋은 것을 받더라도 감사는 하지 않고 먼저 불평을 하게 됩니다. 이 죄의 심각성이 얼마나 크던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인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음식에 대해 징징거리고 물이 없다고 징징거리고 가나안 땅이 차지하기 어렵다고 징징거릴 때 그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광야에서 다 심판을 받아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 징징거리는 사람들을 그냥 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바로 불평하는 백성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징징거리는 아이들의 버릇을 완전히 고쳐야 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순종하는 것을 배워서 자녀교육의 기초가 제대로 놓이고 나면 다음으로 아이들의 성품을 계발해 줘야 합니다. 아이들이 평생 하나님의 훌륭한 자녀들로서 살아 갈 바탕이 되는 훌륭한 성품을 길러 줘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품을 계발하는 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른 성품의 규범이 되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가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둘 다 성품계발에 필수적이면서 서로 보완적입니다. 먼저, 많은 부모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대로, 자신들은 모범을 보이지 않은 채 율법과 그에 따른 징계만 가르치면 효과도 없을 뿐더러 혹시 효과가 있더라도 성품은 바뀌지 않은 채 흉내만 내는 위선적인 아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율법과 징계는 가르치지 않고 모범만 보이면 아이는 자기의 죄성이 이끄는 대로 부모의 모범과는 다른 길을 가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이들에게 율법도 가르치고 모범도 보여야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역시 부모가 모범을 보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말보다는 행동이 아이들의 마음을 더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성품을 잘 계발해서 아이들에게 본이 되면 아이들은 우리의 성품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아이가 우리의 성품이 아닌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 악한 성품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부모가 하나님을 닮아 가고 아이들은 부모를 닮아 갑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하면 부모를 넘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는 있지만 여전히 부모의 영향력 아래 있는 때에는 부모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독선적인 부모에게서 포용적인 아이가 나올 수 없고 이기적인 부모에게서 이타적인 아이가 나올 수 없으며 미움으로 가득 찬 부모에게서 사랑이 많은 아이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성품계발의 관건은 우리의 성품계발입니다. 아이들이 훌륭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자랄지 안 자랄지는 우리가 현재 훌륭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아기와 아동기의 자녀를 키울 때는 먼저 순종을 가르치고 다음에 성품을 계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하나님께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가장 먼저 순종을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의 통치자가 될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궁극적 통치자인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존재이지만 자신도 역시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더 이상의 훈련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처음 가르치신 것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었습니다. 이유를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 순종이었습니다. 아담은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물을 위치에 있지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미성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순종의 이유를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따 먹으면 안 되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부모가 아기에게 왜 부모 말을 들어야 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일들의 핵심도 순종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도 이삭을 바칠 때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순종이었습니다.

이렇게 순종을 가르치신 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닮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성품을 계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성품계발의 두 요소가 율법을 가르치는 것과 모범을 보이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도 가르치시고 자신이 친히 모범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 가르치기와 모범 보이기 중 어느 것을 먼저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도록 하시는 방법으로써 율법을 먼저 가르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자신이 그 율법에 맞는 모범을 보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자신을 닮으라고 율법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5장 14절에 안식일에는 자기 자식들과 종들과 가축들이 모두 쉬게 해야 한다는 율법이 나옵니다. 그러나 15절에 따르면 이 율법은 단지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안식하게 하신 하나님을 본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3장 4-5절에는 원수의 나귀나 소가 곤란에 처했을 때 도와줌으로써 원수를 사랑하라는 율법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애굽에서 다른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원수가 되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써 원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본받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1장 45절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맨 먼저 순종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에 걸맞는 성품을 계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말씀으로만 하지 않으시고 또 이를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이 직접 모범을 보이시고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맨 먼저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는 성품을 계발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말로만 하지 말고 또 이를 말하기 전에, 우리가 직접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후에 아이들에게 우리를 본받으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1 아이들에게 훈육을 언제 시작해야 하는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훈육의 기초는 순종 가르치기이기 때문에 아이가 부모에게 불순종하기 시작할 때가 훈육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이 시점은 아이에 땨라 6개월부터 1년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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