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14: 성경적 훈육수단, 대화

본문: 잠4:23

2012년 5월 6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전에 제가 자녀훈련을 강조할 때 자녀를 진흙반죽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반죽이 굳기 전에 빚어야 자녀를 원하는 대로 잘 키울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진흙반죽 비유에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녀교육에 열심인 사람들, 특히나 훌륭한 자녀교육법을 발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좋은 방법을 사용하면 자녀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빚을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게 되지만 또 다른 좋은 자녀교육법을 알게 되면 어리석게도 똑같은 착각에 다시 빠져듭니다. 왜냐하면 자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빚고자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부모의 염원이고 또 떨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모들의 생각은 자녀들이 능동적인 존재임을 망각한 크나큰 오판입니다. 아이들은 진흙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식물조차도 우리 마음대로 조종하지 못합니다.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화초를 키워도 제각각 다른 모양의 줄기 형태를 만들어 내고 제각각 다른 모양의 꽃을 피웁니다. 동물은 더욱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개를 키워도 개는 각각 성격이 다르게 성장합니다. 하물며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니고 진흙은 더더욱 아닌 고도의 정신능력을 가진 인간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니 경건한 사무엘에게서 뇌물 받고 재판하는 불의한 아들들이 나오고 불경건한 사울에게서 그 의로운 요나단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삼상8:1-3; 삼하1:26).

그러니까 아이들이 우리 손 아귀에 있으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빚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이들은 자신의 관제탑이 별도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보트가 아니고 자신에게 있는 그 관제탑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별도의 인격체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지시를 듣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관제탑의 판단에 따라 움직입니다. 아이들의 이 관제탑은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아닌 우리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듯이 아이들도 우리의 마음이 아닌 자신들의 마음에 따라 행동합니다. 아이들이 우리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것은 그들에게 판단기능을 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우리의 지시를 따르기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이들은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인격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에서 그들의 모든 행동이 나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모든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4:23). 하나님을 믿는 것,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모두가 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잡지 않으면 모든 자녀교육이 결국에는 허사로 돌아갑니다. 지금 당장은 아이들이 말을 잘 듣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자신들의 마음에 숨어 있는 것을 따라갑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그들의 마음을 얻어서 그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가장 훌륭한 수단이 대화입니다.

그런데 아이들, 특히 어린 아이들의 훈육수단으로 대화를 사용하는 데에 반박을 하거나 혹은 반박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정당성을 미심쩍어하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분류하면 여러 유형이 나오겠지만 오늘은 세 가지만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어떤 크리스천들은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아이들을 대화로 설득하는 것은 너무 인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가르치고 아이가 좋든 싫든 그것을 순종하게 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대화하려고 하면 그들은 자신의 죄성에 따라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꾸 나쁜 쪽으로 가려고 하니까 대화는 최소한으로 하고 그냥 지시에 따르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어떤 크리스천들은 아이들의 성장발달기를 무 자르듯이 딱딱 잘라 구분해서 그에 맞는 양육방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컨대, 사춘기 전에는 무조건 통제와 규율에 입각한 양육을 적용하고 사춘기 때는 무조건 대화에 입각한 양육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셋째, 어떤 크리스천들은 아이들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 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보기에 너무나 명백한 죄를 왜 아이들이 짓고 있는지, 자신들이 보기에 너무 쉬운 것을 아이들이 왜 못 하는지 이해를 못 합니다. 그래서 대화를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방식을 아이들에게 강요합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옳을까요? 그들의 세 가지 유형을 차례대로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칼빈주의의 유명한 교리인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는 인간 안에 선한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영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부패해서 하나님을 알고 믿는 일에 전적으로 무능해졌다는 말입니다. 다른 면에서는 전적으로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불신자들도 하나님을 믿는 일 말고는 굉장히 많은 선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에게도 양심이 남아 있어서 선악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바로 이 양심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양심이 남아 있지 않다면 대화는 무의미합니다. 아무리 선을 행하도록 설득해 봐야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 안에도 양심이 최후 보루로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양심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잡으려는 악한 유대인들에게 양심에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찾기 위하여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주위에 둘러 섰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문제를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아이들을 훈육할 때 이렇게 그들의 양심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 어려서 양심이 덜 발달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에게는 분명히 선하게 자라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양심이 훈육방법으로서 대화가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입니다.

둘째, 아이들의 성장발달기는 칼로 무 자르듯이 선을 그어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소년기 등을 경계짓는 선은 흐릿합니다. 따라서 어떤 양육 방법을 몇 살부터 몇 살까지 사용하고 그 다음에는 다음 양육 방법으로 넘어 가고 하는 식으로 양육법을 딱딱 구분지어서 사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몇 살 때까지는 매로 키우고 다음부터는 대화로 키우고 이렇게 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은 계단식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은 어떤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 다음 단계가 되면 훌쩍 뛰어서 또 다음 상태를 유지하고 이런 식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보다는 아이들은 비탈진 오르막 길처럼 자랍니다. 계속 자라서 새로운 특성을 띠게 되지만 여전히 어릴 때의 특성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 특성이 점점 약해질 뿐입니다. 따라서 아주 어린 아이에게도 매를 대야 하지만 왠만큼 큰 아이에게도 매를 대야 합니다. 그리고 큰 아이와도 대화를 해야 하지만 아주 어린 아이와도 대화를 해야 합니다. 단지 아이가 자랄 수록 초달(楚撻)의 비중은 줄고 대화의 비중은 늘 뿐입니다.

우리의 양육 모델인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자녀인 이스라엘을 양육하실 때 같은 식으로 하셨습니다. 신약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양육하시는 방식이 주로 대화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토도 달지 말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이해를 못 해서 질문하면 그에 대해 답을 해 주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도 하셨습니다(마16:15; 눅10:36). 그러나 구약 때는 하나님의 양육방식이 사뭇 달랐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냥 순종하도록 명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대화를 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 아브라함과 나누셨던 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창18). 그리고 모세를 부르시기 전에 모세와 나누신 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출4).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충분히 성숙했을 때인 신약 때뿐만 아니라 아직 미성숙할 때인 구약 때도 이스라엘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충분히 자란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직 어린 아이들과도 대화를 해야 합니다.

셋째, 아이들을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의 관점으로 바라 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율법은 누구에게나 엄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사람마다 다르고 또 각자가 처한 환경도 다 다릅니다. 아이들은 율법을 이해하고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와 다르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도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아이들이 미성숙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들의 눈높이로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방법은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할 때 쓰신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자신의 완전한 율법을 들이 대면서 우리를 다그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눈높이로 자신의 관점을 낮추셨습니다.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와 똑같은 마음과 육체를 가지심으로써 우리처럼 느끼시고 우리처럼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의 시험과 고난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2:17-18).

이런 성육신의 원리는 우리가 아이들과 대화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합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대화를 말을 하기 위해서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만나서 대화를 잘 나눴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신나게 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자신이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방이 잘 들어 줬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고 상대방의 처지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입니다. 대화의 이러한 원리는 자녀와 대화할 때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이들과 대화할 때는 우리는 아이들을 아직 미숙한 존재, 가르침이 많이 필요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가 주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 바로 그들이 뭘 잘못했는지 뭘 고쳐야 하는지를 말하다 보면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아이들이 무슨 죄에 쉽게 넘어 가고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무슨 죄와 싸우고 있는지를 알아 낼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는 아이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입니다. 아이가 동생을 때렸을 때 우리는 왜 동생을 때렸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동생을 때렸을 때 그 아이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동생이 대들어서 때렸는지, 동생에게 부모의 사랑을 뺏겼다고 생각해서 때렸는지, 동생을 괴롭히고 싶어서 때렸는지, 배가 고파서 신경이 날카로와졌는데 동생이 귀찮게 해서 때렸는지, 우리는 정확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책을 찾아서 아이가 동생을 때리는 행동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냥 동생을 때리는 것이 나쁘다고 말한 후 매를 대고 끝내는 것은 아이의 마음을 바꾸는 데는 별 효과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의 깊은 대화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죄성을 인식하고 분별해내는 능력을 길러 줍니다. 아이가 동생을 때렸을 때 아이의 마음에 있는 동기를 알아내지 않고 그냥 “동생 때리는 건 나쁜 거야!”하고 매를 대고 끝내 버리면 아이는 동생을 때리는 것이 나쁘다는 단순한 사실만 배웁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가 왜 동생을 때렸는지 그 이유와 동기를 주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끌어내면 자신이 죄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또 어떤 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동생을 때렸을 때 아이도 자신이 왜 동생을 때렸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가 나니까 그냥 때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부모가 아이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잘 인도해 가면 아이들이 자신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인식하게 됩니다. 화가 났는데 그 화가 왜 났는지를 알게 됩니다. 부모가 동생을 더 예뻐한다고 생각해서 화가 났는지, 동생이 귀찮게 굴어서 화가 났는지, 형한테 화가 난 것을 화풀이한 것인지 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왜 그런 것들이 죄가 되는지 부모가 적절하게 설명을 해 주면 아이가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결국 부모로서 우리의 가장 큰 임무는 아이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인데,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주의 깊게 대화를 나누면 그 임무를 훌륭히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살펴 보자면, 먼저 아이에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우쳐 준 후 그 죄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절망에 빠진 아이에게 예수님의 대속과 용서를 알려 주어서 희망의 메시지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도 아이는 계속해서 죄를 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자신의 힘으로는 죄성을 고칠 수 없고 오직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만이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해야 합니다. 이처럼 아이가 잘못했을 때 우리는 아이와 주의 깊게 대화를 함으로써 아이가 앞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어 갈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우리는 매를 대면서 혼내기만 함으로써 놓쳐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훈육수단으로서 매와 대화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 두가지는 모두 다 자녀를 훈육하는 데 꼭 필요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이 둘을 다 사용해야 훈육을 균형 있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매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우리가 자녀를 다스린다는 것을 나타내며 대화는 교제의 상징으로서 우리도 자녀와 같은 인간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매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상징하며 대화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상징합니다. 매는 우리와 다르신 하나님을 상징하고 대화는 우리와 같으신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또한 매와 대화는 인간 본성의 성격 때문에 둘 다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타락했지만 완전히는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매가 필요하고 완전히는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가 필요합니다. 아이들 안에 죄성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죄성을 제어하고 쫓아내기 위해서 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타락한 중에도 아이들 안에는 양심이 남아 있기 때문에 대화가 가능하고 또 대화가 필요합니다.

한편 삼위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들을 다루시는 방법에도 매와 대화의 이런 균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성자를 보내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무시무시한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성부께서는 이로써 죄를 지으면 무서운 형벌을 내리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셨습니다. 이것은 자녀교육에 있어서 초달(楚撻)에 해당합니다. 한편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처벌하신 후에 우리가 계속 죄성에 젖어 살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살도록 그 율법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셨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6-27).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교훈을 아이들의 마음에 새기는 수단은 주로 대화이기 때문에 이 성령님의 사역은 자녀훈육 방식 중 대화에 해당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부께서 자녀인 우리들을 양육하실 때 성자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둘 다 사용하셔서 삼위일체적 완전을 이루시듯이 우리도 우리의 아이들을 양육할 때 초달과 대화를 둘 다 사용해서 완전한 훈육체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온전하게 키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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