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13: 성경적 훈육수단, 매

본문: 잠22:15

2012년 4월 22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요즘 시대는 권위를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권위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권위라는 말을 ‘억압,’ ‘통제,’ ‘명령’ 등과 동일시하면서 권위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날라치면 온 몸으로 저항합니다. 그리고는 ‘상호존중’과 ‘자유’를 소리높여 외칩니다. 권위에 바탕을 둔 수직적 관계를 거부하고 상호존중에 바탕을 둔 수평적 관계를 열렬히 환영합니다. 이런 경향은 기독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요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을 경외의 대상보다 친구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저 높은 하늘에 계시면서 위엄과 권능에 찬 모습으로 계시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옆에서 희노애락을 같이하시는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초월성보다 하나님의 내재성(內在性)을 좋아합니다.

이런 경향은 가정생활에도 바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위가 부정되고 둘 사이의 평등이 강조됩니다. 비록 성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말은 꺼내기도 힘듭니다. 가장이 권위를 가지고 가정을 이끌어 가려고 하면 반민주적이며 억압적이라고 지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권위를 가지고 자녀를 키우는 것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런 교육은 자녀의 인격과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 받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권위의 상징인 매가 가정교육 현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군다나 매를 사용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인식은 이런 반감을 더욱 부채질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에서는 부모의 초달(楚撻)조차도 아동학대로 간주되어 금지된 상태입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과거의 권위주의적 문화에 대한 반발이 컸습니다. 옛날에는 웃사람이 시키면 무조건 해야 했습니다. 그때는 아랫사람의 의견이 묵살되고 아랫사람의 인권이 무시되는 시대였습니다. 옛날에 우리가 자란 환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에는 어른이 말할 때 똑바로 눈을 쳐다 보면 건방지다고 혼났습니다. 그리고 남편한테 매맞는 아내와 부모에게 폭행당하는 자녀가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의 수평적 관계를 추구하는 경향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옛날의 경직된 권위주의 문화를 중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흐름이 일부 영역에서 지나치게 수평적으로 가고 있는 점은 상당히 염려스럽습니다. 권위주의가 문제이지 권위가 문제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 권위를 오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권위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호존중 가운데 사용되는 권위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긍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미숙한 행위가 무분별하게 횡행하는 것을 막아 사회를 안정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내재성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초월성도 중요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평등도 중요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차이도 중요합니다. 부모와 아이의 상호존중도 중요하지만 부모의 권위도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후자들만 강조해서 권위주의로 흘렀습니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전자들만 강조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존중하는 조화로운 세상이 되는 대신에 무질서한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쪽만 붙들지 말고 둘 다 붙들어야 합니다. 이 원리를 오늘의 주제에 적용을 하자면, 아이를 존중하기도 해야 하지만 매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도 초달을 지지할까요? 물론입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견해가 둘로 갈렸습니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습니다. 맹자는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데 외부환경에 유혹을 받아서 악해진다고 보았고, 순자는 인간은 악하게 태어나므로 의지적으로 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둘 중 아담 이후의 인류의 본성에 관해서는 성경은 성악설과 궤를 같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창8:21).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인 중의 하나로 인정받는 다윗조차도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악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5).

이렇게 아이들이 악하게 태어나는 것은 우리가 아이들을 잘 관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선하게 태어난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훈계가 아닙니다. 그냥 정보만 주면 자신들이 알아서 도덕적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듯이 우리 아이들은 착하게 행동하라고 그렇게 일러도 오히려 악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성이 본래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 안에 있는 악이 무섭게 자라나지 않도록 쫓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성경은 초달을 권장합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매, rod)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22:15).1 나쁜 일을 했을 때 맞는 매가 아이들이 죄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대략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알려 주는 것이고 두번째는 아이들의 마음과 행동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먼저, 초달을 할 때 우리가 화가 나서 매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매를 들어도 안 됩니다.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매를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의 잘못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규칙을 어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규칙을 어긴 것입니다. 우리가 화가 난 것은 다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난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초달은 하나님의 성품 중 공의, 즉 선을 상주고 악을 벌하시는 성품을 아이들에게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자녀를 양육할 때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이에게 사랑을 부어 주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을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이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기꺼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런 것들은 찬성하는 분들도 공의의 하나님을 알려 주기 위해 매를 드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그냥 말로만 꾸짖거나 가벼운 벌을 주는 것을 찬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그런 것보다 훨씬 무섭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죄를 지으면 그 결과가 얼마나 크고 무섭습니까? 아담은 선악과 한번 따 먹는 바람에 아들 간에 즉 카인과 아벨 간에 살인이 벌어졌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 한번 하는 바람에 아들 압살롬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후궁들과 대낮에 백성들 앞에서 동침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서운 결과도 나중에 최후의 심판 때에 악인이 받을 형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죄 가운데 산 사람은 지옥의 무시무시한 형벌을 영원히 받기 때문입니다. 초달은 이런 결과를 아이들에게 미리 학습시켜서 그들을 지옥에서 구원하는 작용을 합니다. “네가 그를 채찍(매)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잠23:14).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초달할 때 아이가 무서운 고통을 느끼도록 때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2

그러면 징벌이 초달의 목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초달의 목적은 징벌이 아니고 교정(矯正)입니다. 징벌만 하는 것은 아이에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교정은 아이의 미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에 징벌은 아이의 과거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징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루시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벌하시는지 아니면 용서하시는지까지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계하시는 데서 끝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악한 성품을 고쳐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새 사람으로 부활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을 징벌하는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바꾸셔서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징벌이 아니라 교정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것은 그를 부활시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이들을 징벌하는 목적은 교정이 되어야 합니다. 초달의 목적은 교정인 것입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초달을 극구 반대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핵심적인 것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초달은 아이에게 상처를 준다.3 둘째, 초달을 하면 아이가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과연 초달이 아이에게 상처를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바르게 매를 사용하면 아이는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이 아이를 그르게 초달할 때만 아이가 상처를 받습니다. 1) 아이를 억울하게 때리면 상처를 받습니다. 아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또는 아이가 저지른 정도에 비해서 과도하게 때리면 상처를 받습니다. 2) 아이를 미움으로 때리면 상처를 받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해서 때리는지 미워해서 때리는지 다 압니다. 그리고 그 무자비한 매에 스며 있는 미움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3) 아이를 분노로 때리면 상처를 받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더라도 홧김에 때리면 아이는 상처를 받습니다. 4) 아이를 미숙한 것에 대해서 때리면 상처를 받습니다. 아이가 할 능력이 안 돼서 못 하는 것을 못 한다고 때리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초달을 하면 아이가 폭력적으로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부모가 하는 행동을 보고 배워서 똑같이 합니다. 그러니까 초달하는 부모의 아이들은 초달을 배워서 나중에 그대로 합니다. 그러나 초달은 폭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때릴 때 그것이 폭력이 되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갖추어야 합니다. 때리는 이유가 부당하거나 아니면 사적으로 때려야 합니다. 먼저, 때리는 주체가 누구이든 그 이유가 부당하면 그것은 폭력이 됩니다. 설사 국가가 집행해도 그 이유가 부당하면 폭력입니다. 경찰이 공무 중에 부당하게 누군가를 때리면 그것은 국가폭력입니다. 그리고 개인이 누군가를 부당하게 때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폭력입니다.

다음으로, 이유를 불문하고 개인이 누군가를 때리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개인이 누군가를 부당한 이유로 때리면 그것은 당연히 폭력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라고 하더라도 개인이 누군가를 때리면 그것 역시 폭력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때렸을 때 우리가 그것을 맞받아 때리면 이유는 정당합니다. 그 쪽에서 먼저 때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보복을 국가에 위탁하지 않고 자신이 했기 때문에 그것은 폭력이 됩니다. 개인이 보복을 행할 때는 자신의 분노가 들어가기 때문에 정당하게 집행하기 어렵습니다. 한 대 맞았다고 한 대 때리더라도 맞은 것보다 세게 때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인이 누군가를 때리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모두 폭력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집행을 맡기신 국가가 정당한 이유로 때릴 때만 폭력이 아니게 됩니다. 이것을 초달에 적용하면 부모가 아이를 사적으로(즉, 자신의 분노나 미움을 담아서) 때리거나 부당한 이유로 때리면 폭력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적 대리자로서의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정당한 이유로 때리면 폭력이 아니게 됩니다.4 그러니까 초달을 바르게 하면 절대로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부모의 초달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사적으로( 즉, 자신이 직접 분노를 담아서) 남을 때리거나 아니면 부당한 이유로 남을 때리는 일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달을 한다고 해 놓고 사적으로 또는 부당하게 아이들을 때리면 그 순간 아이들은 폭력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정부가 초달을 금지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천들 특히나 홈스쿨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초달을 금지하는 정부를 가정교육까지도 간섭하려 하는 악한 반기독교 세력으로 매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볼 게 아닙니다. 저도 정부가 초달을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부가 가정폭력을 금지하는 것은 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남편한테 맞는데 또는 아이가 부모한테 육체적 학대를 당하는데 가만히 있는 정부가 잘 하는 정부이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정부가 초달을 금지할 때는 그 의도가 대체로 선합니다. 아동학대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초달을 금지하는 것이지 아이들이 엉망으로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초달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초달을 금지하는 정부를 성토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초달이 폭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초달과 폭력행사의 차이를 알려 줘야 합니다. 특히 크리스천 심리학자나 아동학자는 최선을 다 해 연구해서 초달이 얼마나 자녀를 잘 키우는 데 효과적인지 보여 줘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초달이고 어떤 것이 폭력행사인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는 계속해서 아동학대뿐만 아니라 초달까지도 금지하려 들 것입니다. 가정폭력을 방지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 의무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무이기도 합니다. 정부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를지라도 말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 크리스천 부모들은 더욱더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고 초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초달을 한답시고 폭력을 행사하면 할수록 정부는 더욱더 성경적인 초달마저도 금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이들을 억울하게 또는 자기 분노로 매질하고 있다면 바른 초달마저도 못 하게 막는 것은 정부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가정뿐만 아니라 다른 가정의 바른 자녀양육까지도 방해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다른 가정에게 미안해해야 하고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초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훌륭한 훈육수단입니다. 그래서 매를 못 쓰게 만들어 놓은 현재의 교육환경에 우리는 울분을 터뜨립니다. 성경에서 하라는 대로 바르게 아이를 초달했는데 경찰서에 불려가고 심하면 아이를 뺏기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이런 상황에 너무 정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초달을 지지하는 시대가 다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항상 정반합(正反合)의 원리로 발전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우리는 이런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진자운동같은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이성 중심의 기독교와 감정 중심의 기독교 사이를 왔다갔다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종교개혁 후에는 그 운동을 이론적으로 정교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교리를 정밀하게 다듬는 시대가 따라 왔습니다. 그래서 각 교파가 신앙고백을 만들고 자신들의 교리를 정교하고 치밀하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성 중심적인 종교는 기독교를 건조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을 숨 막히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이런 이성 중심적 종교에 반발해서 실천과 체험과 감정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운동, 감리교 운동, 대각성운동 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과 체험 중심의 종교는 교회에 이성의 빈약화를 초래해서 다시 이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한 끌어 올리는 자유주의의 발흥을 불러 왔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까지도 자신들의 이성으로 이리 분해하고 저리 분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기독교는 다시 메말라 갔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영적 목마름은 다시 성령님의 체험적 역사를 강하게 사모하는 오순절 운동을 불러 왔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이성 중심과 감정 중심을 진자처럼 왔다갔다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가운데 길로 걸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유한한 인간은 한 번에 바로 균형을 잡을 수 없어서 좌우로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좌우의 흔들림은 결국 점점 가운데로 모일 것입니다. 좌우로 흔들리던 진자가 결국은 정 가운데에 가서 멈추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재는 사람들이 권위주의에 질려서 권위를 무시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결국은 사람들이 권위가 사라진 데 따른 무질서에 위기를 느껴서 다시 권위를 찾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가정이든 학교든 교육 현장에서 권위가 사라진 결과 아이들은 부모 말도 안 듣고 청소년들은 무서워서 건드릴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권위에 바탕을 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교육현장에 권위를 불러 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도 여전히 세상은 불완전해서 우리는 참된 권위에 따른 교육이 아니라 권위주의에 따른 교육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에 보았던 권위주의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진 권위주의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권위주의에 반발해서 권위를 배척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예전에 있었던 권위배척 시대보다는 훨씬 더 약화된 권위배척 시대를 볼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점점 더 균형잡힌 상태로 변해 갈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 초달을 금지한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역사는 그 분의 통치 하에 진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잠언에서 미련함 또는 어리석음(folly)은 단지 바보같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악과 죄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잠24:9).

2 당연히 초달을 하면서 아이들을 상해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아이들을 상해하지 않으면서도 또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이 무서운 고통을 느끼도록 초달할 수 있는 방법들은 많이 있다.

3 ‘상처를 받는다’는 말은 아이들이 받는 영향의 수동적인 면만을 나타낸다. 능동적인 면은 아이들이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상처 받는 것에 대해 적용되는 원리는 분노를 느끼는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즉 본문에서 나열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네 가지는 아이들에게 분노도 일으킨다.

4 본질적인 의미에서 자녀를 키우는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부모는 다만 그 분의 대리자일 뿐이다. 각 자녀는 부모의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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