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12: 결국은 사랑이다

본문: 고후5:11-15

2012년 3월 25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통제’는 현대 사회가 매우 싫어하는 말입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과거에는 권위주의적인 문화 아래에서 사람들이 억압당하고 통제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통제를 싫어하는 현상은 자녀양육 현장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권위를 가지고 자녀를 통제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지시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된 권위주의적인 문화의 유산이고 아이들을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야만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합니다. 자녀의 의견을 존중해서 키워야 아이들이 더욱 책임감 있고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적용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어린 자녀 대신 결정을 내리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들은 아이가 직접 결정을 하도록 허용해야 아이가 사고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길러서 나중에 좋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일면 맞는 말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문제가 있는 생각입니다. 아이가 좋은 결정을 내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자신이 직접 해 봄으로써가 아니고 성숙한 부모가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것을 지켜봄으로써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가 결정을 내리도록 내버려둔다면 아이는 자신의 미숙한 사고의 한계 내에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일만 반복하게 됩니다. 음식을 예로 들면, 무엇을 먹을지 고르라고 하면 아이들은 항상 몸에는 안 좋지만 당장 입에 즐거움을 안겨 주는 것들만 선택합니다. 과자,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아이들이 현미밥이나 된장찌개를 고를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당장 입에 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결정권을 맡길 경우에 생기는 또 다른 큰 문제는 아이가 모든 일의 주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반찬이나 간식도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옷도 자기가 입고 싶은 것을 입고 자란 아이가 무엇인들 제 맘대로 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떼를 쓰거나 황소고집을 부립니다. 이러니 엄마와 아이가 하루 종일 씨름하는 일이 생기지요. 그러니까 바른 교육을 위해서 부모가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정당하고 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권위와 통제에는 부정적인 이면이 숨어 있습니다. 비록 옳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규율과 통제로만 아이를 키우려 하는 부모는 반드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규율과 통제로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이 아주 이상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크리스천들을 예로 들면 그들은 성경적 양육에 열심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성경적 양육에 관한 책도 많이 읽고 세미나에도 열심히 참석해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키울까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는 그런 데서 얻은 방법을 아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칩니다. 부모님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치고 말을 예의바르게 하도록 가르치고 성경을 열심히 읽도록 가르칩니다. 자신이 배운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아이들에게 적용합니다. 그런 열심에 부응해서 아이들도 교육받은 대로 잘 따라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교육받은 아이들 중에 왠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예의바르고 친절하지만 왠지 차갑습니다. 그들이 베푸는 친절을 받으면 왠지 불편합니다. 고맙기는 한데 마음이 영 개운하지 않습니다. 딱히 잘못하는 것을 집어낼 수는 없지만 왠지 정이 가지 않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이들의 행동에 마음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동에 마음이 녹아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이들이 겉과 속이 따로 노는 이유는 그들이 부모의 가르침을 마음으로는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옳다고 하니까 하기는 하는데 마음 깊은 곳에는 반발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이들은 부모가 있는 데서는 교육받은 대로 잘 하지만 없는 데서는 본성이 드러납니다. 부모가 있을 때는 동생들과 잘 놀다가 부모가 눈에 안 보이면 동생들을 때리고 괴롭힙니다. 또 어려서 부모의 통제 아래에 있을 때는 순순히 따르다가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가 십수년을 밤낮으로 가르쳤던 것들을 하루 아침에 벗어 던집니다. 그리고는 부모와 교회의 걱정거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이 안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마음으로도 부모님을 순종하고 따르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행동이 바를 뿐만 아니라 마음도 따뜻한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행동이 아닌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이들을 양육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이들을 양육 대상으로 보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이들을 양육하되 그들을 양육대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을 우리가 정한 양육법을 빈틈없이 따르는 비인격적 존재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는 고귀한 영혼을 가진 인격체입니다. 그냥 무언가를 입력하면 무언가가 출력되는 기계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라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면 저렇게 하는 서커스단의 곰이 아닙니다. 기계나 서커스단의 곰을 다룰 때는 기계나 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에만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러나 자녀를 양육할 때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녀보다 자녀가 어떤 결과를 내느냐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자녀를 사랑해야지 아무리 성경적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양육방법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자녀양육방법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자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양육방법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기보다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아이가 시키는 대로 잘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아이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만약 그런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면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행동을 사랑한다고 느끼게 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법을 사랑한다고 느끼게 됩니다. 자신은 부모가 사랑하는 그 ‘훌륭한’ 양육법을 적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고 느끼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훌륭한’ 율법을 잘 지키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시고 정작 우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해낸 결과물에만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가 그것들을 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리가 그것들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게 죄와 싸워야 했는지, 우리가 그 어둠의 터널들에서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등에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무슨 생각이 들까요?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친밀하고 살가운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냥 바라만 보아도 좋은,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은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을까요?

자녀양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우리의 훈련대상으로만 보면 아이들이 바른 행동을 하는 청년으로 자랄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애틋한 감정을 가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 없이 차갑게 원칙만 강조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람 냄새 안 나는 비정한 규율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때 자신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지만 확인하지 말고 자신과 관계가 얼마나 잘 유지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자신의 점검목록에 있는 항목들을 아이들이 잘 수행하고 있다고 기뻐하지 말고 아이들이 자신과 함께 있기를 즐거워하고 자신과 아이들의 관계가 친밀해지는 것에 기뻐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마음으로 부모를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양육하지 않고 항상 통제하고 항상 잘못만 지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사람에게 치명적으로 끌립니다. 그래서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위험한 또래들에게 넘어가기 쉽습니다.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인정을 또래들에게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자녀양육 세미나로 유명한 어느 목사님의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1 그 목사님은 자녀양육 강사답게 온갖 훌륭한 성경적 양육법에 정통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들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충실하게 적용했습니다. 어느덧 큰 아들이 자라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목사님은 그 아들을 크리스천 친구가 매니저로 있는 한 가게에서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자신의 아들은 스케쥴상 그 친구와는 같은 시간대에 일을 못하게 됐고 대신에 몸에 문신하고 머리를 물들인 사람들, 마약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시작한지 한 달 쯤 된 어느 날 아들이 물어 본다는 말이 “저 머리 파란색으로 염색해도 돼요?”였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물어 본 말은 “저 귀 뚫어도 돼요?”였습니다. 당연히 그 목사님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에 그 목사님이 자신이 아들을 키운 방식을 되돌아 보았을 때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한 직후에 아들이 자기에게 “그 사람들이 저를 좋아해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그 사람들의 이상한 것들을 따라하려고 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 줬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에서는 그 ‘훌륭한’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해서 날마다 꾸중만 듣다가 드디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훌륭하고 고귀한 가정문화가 저속한 문화에 KO패 당했습니다. 왜일까요? 그 저속한 문화가 그 훌륭한 가정문화보다 흡인력이 있어서요? 그 아들이 그 저속한 문화를 자기 가정문화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요? 아닙니다. 그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그 사람들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그 사람들에게서 찾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목사님 부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여러 좋은 양육법을 가지고 열심히 키웠겠지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신의 아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들이 경탄해 마지 않았던 그 양육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들보다 자신들의 양육법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아들을 잃을 뻔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인정을 듬뿍 받아야 또래들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교회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교회 밖에서 사랑을 찾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아이들을 비기독교학교에 보내는 부모들, 아이들을 사회에 내보내는 부모들은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규율과 통제는 자녀양육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은 죄성을 타고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성을 제어하고 몰아내기 위해서는 규율과 통제가 필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독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독재에도 독재를 위한 독재가 있고 사랑의 독재가 있습니다. 독재를 위한 독재를 하면 사람들이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이를 갑니다. 그러나 사랑의 독재를 하면 사람들이 마음으로도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독재로 다스리시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기꺼이 순종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다른 독재자들에게는 이를 갈지만 예수님의 독재에는 기꺼이 순종합니까? 다른 독재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독재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독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아이들을 독재로 다스리면 아이들의 마음에는 분노가 자라갑니다. 남들에게 체면 깎일까봐, 남들에게 애들 잘 못 키운다고 책잡힐까봐, 그리고 자신이 훌륭한 부모라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아이들을 규제하면 결국에는 아이들이 빗나갑니다. 어릴 때는 잘 순종하는 듯하지만 나중에 자기가 힘이 생기면 그 독재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이유가 아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해서라면 그 마음이 아이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런 독재라면 아이들은 기꺼이 순종합니다. 체벌도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 사도가 왜 자신들이 그렇게 미친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또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위해서 몸을 다 바쳐서 사역하는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왜 그 모든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지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5:13-15).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죽으신 그 사랑이 어떤 곤란과 어려움도 불평없이 감당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하나님의 백성의 원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인 이스라엘이 아주 훌륭하게 잘 성장해서 세상에 빛이 되는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출19:5-6). 그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온갖 훌륭한 율법을 주셔서 그들이 그것들을 잘 지키면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와 열왕기가 잘 보여 주듯이 이스라엘은 기대와는 달리 거듭거듭 빗나가고 엇나갔습니다. 이방신을 숭배하고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사람을 학대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고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역병으로 치시고 기근으로 치시고 전쟁으로 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조금 돌아서는 것 같더니 도로 악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위협과 경고도 통하지 않았습니다(예컨대, 신28:52-57의 경고). 그런 망나니같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린 것은 딱 하나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옛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온갖 규율과 통제에도 빗나갔지만 새 이스라엘인 교회는 예수님의 희생에 감동되어 마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권위로 위협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창조주이시고 또 그 분의 율법은 항상 옳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권위로 밀어 부치시지 않았습니다. 패역한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 분이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자신의 율법을 사랑하시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분이 우리보다 율법을 더 사랑했더라면 율법을 시도때도 없이 어기는 우리를 당장 지옥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율법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의로운 율법을 무효화시키는 일을 감행하셨습니다. 율법을 어겼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율법을 어긴 우리대신 아무 죄가 없는 자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의로운 양육법을 사랑하지 말고 우리의 아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훌륭한 양육법이 아닙니다. 우리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옳거나 우리가 자기들을 키우는 방식이 옳다고 우리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1 http://www.familyministries.com/HS_Crisi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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