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성령세례와 불세례

본문: 마3:9-12

2014년 12월 7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임박한 천국에 동참하러 세례를 받으러 나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꾸짖으면서 말합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속한 언약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고 율법과 언약과 성전을 소유하고 있으니 자신들은 영원히 아브라함의 자손일 줄로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성전에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있으니 자신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한번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영원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도 과거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지만 그 자격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모세 율법 곳곳에 “율법을 어기면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북왕국 이스라엘이 언약에 불순종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서 떨어져 나간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마23:30). 자신들은 옛날의 불충실했던 조상들과 달리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참으로 유대인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다음의 말로 그들의 이러한 자부심과 확신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 말로써 세례 요한이 뜻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슨 대단한 존재들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하찮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너희도 언제든지 새로 생겨 날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그 지위를 넘겨 주고 너희는 그 지위를 잃어 버릴 수 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지위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언제든 그 지위를 잃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만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선포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원해내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가져다가 가나안 땅에 심으신 것으로 묘사합니다(시80:8).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은 극상품 포도를 심으셨는데 이스라엘은 들포도를 맺었다고 한탄하십니다(사5:2).2

하나님께서는 온갖 이적과 기사를 통해 이집트에서 구원하심으로써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율법을 주셔서 훌륭한 나라를 이룰 수 있는 기반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살기에 풍요로운 땅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선과 교만과 탐욕에 가득찬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포도나무를 찍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가지치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끼로 아예 뿌리째 찍어서 불에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경고를 한 후에 실제로 그 경고를 집행할 분을 소개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당시에 종들은 주인이 나오면 신을 가져다가 신기 편하도록 앞에 놓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 분의 종도 못될 만큼 뒤에 오시는 분이 위대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능력이 많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더 강하다(stronger, mightier)’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왜 이 장면에서 자기 뒤에 오시는 이 즉 예수님께서 자기보다 강하다고 말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축복과 심판을 베푸는 데 있어서 예수님께서 자신보다 강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실 일의 맛보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천국이 곧 올 것이라고 선포하고는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어서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채비를 갖추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은 힘이 약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었는데 스승의 권유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12사도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요1:35-40; 마10:2). 따라서 그는 분명히 세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잡히실 때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마26:56).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기의 순간에 무서워서 스승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을 받은 후에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순교를 당했습니다.3 예수님의 성령 세례가 세례 요한의 물 세례보다 더 강했던 것입니다.

한편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말로 혹독하게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하기도 하고 “너희가 무슨 아브라함의 자손이냐”고 말하기도 하고 “너희가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무시무시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원 후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을 죽이게 하셨습니다.4 예수님의 심판이 세례 요한의 심판보다 더 강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자기 뒤에는 축복이든 심판이든 더 크고 강하게 내리실 분이 오시니 알아서 미리 준비하라고 강력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세례 요한이 말하는 예수님의 불 세례가 기원 후 70년의 예루살렘 심판이 아닌 예수님 재림 때의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은 기원 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이 구속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를 간과합니다. 그들은 신약을 읽을 때 탈이스라엘적으로 읽습니다.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이 유대인들인데도 대상이 우리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내용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선포한 심판을 우리에게 선포한 심판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둘째, 그들은 신약에서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을 오해해서 그것들이 우주의 종말 사건 즉 예수님 재림 때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 29절의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는 표현과 베드로후서 3장 12절의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으려니와”라는 표현이 우주의 종말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당시 유대사회를 통치하던 체제가 무너진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셋째, 앞의 두 가지 이유로 그들은 신약에서 말하는 심판들이 거의 다 예수님 재림 때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본문 12절을 해석할 때도 그렇게 해석합니다. 즉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이는 것은 신자를 천국에 들이는 것이고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것은 불신자를 지옥에 보내서 불로 심판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불이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했으니 현세의 불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도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은 죽음을 면하게 하셔서 이미 도래한 천국에 참여하게 하셨고, 불경건한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게 하셔서 음부에서 지옥의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의 형벌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성경은 7절에서 예수님께서 내리실 심판을 ‘임박한 진노’라고 표현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그 때부터 수천년 후에나 일어날 사건인데 어떻게 수천년 후에나 일어날 사건이 ‘임박한 진노’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말한 예수님의 불 세례는 최후의 심판이 아닌 70년의 예루살렘 심판을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오시는 사건은 심판이기도 하지만 축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고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입니다.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 예수님을 거부하고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유대인들의 박해에서 벗어나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세상에도 끝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 가운데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고대하는 우리들은 영원한 복락 가운데 들어갈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세례를 통한 축복이 후에 있을 예수님의 더 큰 심판과 더 큰 축복의 전주곡이었듯이,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불행과 행복은 나중에 우리가 맞을 무시무시한 심판과 형언할 수 없는 복락의 전주곡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여 천국을 준비했던 지혜로운 사람들처럼 우리도 지금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경고를 듣고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 사도행전 1장 5절을 보면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의 성령 세례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4 이것이 11절에서 세례 요한이 말한 예수님께서 베푸실 불 세례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 때 성령님께서 불의 혀같이 임하셨다는 사실을 들어 이 불 세례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 10절과 12절에서 세례 요한이 불을 심판의 도구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11절의 불 세례도 성령강림의 복보다는 심판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에서처럼 성경에서 불은 대체로 심판을 상징했다. 물론 예수님의 불세례가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불로써 이스라엘(또는 교회) 내의 가라지들을 태워 버려서 이스라엘(또는 교회)을 정화하셨다.

1 thought on “예수님의 성령세례와 불세례”

  1. 임박한 진노를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해해서
    그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근처에 매장지로 사용할 토지 구매를 서둘렀고
    그 영향으로 땅값이 엄청나게 상승했다는 얘기를
    남편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아마도 세례 요한 시대의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시리라 믿었던 듯해요.

    임박한 진노가 70년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면
    괜히 땅 사고 집안 정리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을텐데요.ㅋㅋㅋ

    저야말로
    이제 목사님의 명쾌한 설교를 들었으니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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