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환란은 지나갔다 1

대환란은 지나갔다 1

본문: 마24:1-28

2010년 8월 1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목사

 

지난 시간에는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을 비교하면서 세상은 좋아져 왔고 앞으로도 좋아진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사탄이 이 세상의 왕이었는데 예수님의 사역으로 사탄이 쫓겨나고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시기 때문에 세상이 좋아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좋아진다고 즉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한다고 말하는 성경구절들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이 세상이 좋아진다고 말하고 있다고 확실히 주장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견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 산을 넘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산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지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산은 대환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마태복음 24장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말씀하신 내용이기 때문에 감람산 강화라고도 하지요. 후천년주의자들은 여기에서 얘기하는 대환란이 기원 후 70년에 로마군에게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이미 일어난 사건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천년주의자들과 무천년주의자들은 이 대환란이 세상 마지막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대환란이 미래의 일인데 어떻게 앞으로 세상이 좋아진다고 말할 수 있냐고 강변합니다. 감람산 강화가 미래의 일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3절에 나와있는 대로 이 감람산 강화는 제자들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에 관해 질문했을 때 대답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 끝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의 내용들을 다룬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또 14절에서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대환란이 온다고 말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이 멸망한 1세기에는 물론 지금도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환란은 미래의 사건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29절에서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지격변을 묘사하고 있는데, 1세기에 그런 우주적 대사건은 없었으며 이것은 예수님 재림시에 일어날 우주적 변동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30절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인자가 오시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감람산강화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31절에서는 천사들이 택자들을 사방에서 모은다고 하지 않는가? 이것이 세상 끝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그들은 3절에 나타나 있듯이 감람산강화가 제자들이 성전파괴가 언제 일어나는지 질문했을 때 답변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질문 중에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대한 내용도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답변이 중의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성전파괴와 세상의 종말은 유사한 사건이므로 한 사건인 것처럼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1세기 당시의 이스라엘의 심판과 세상 마지막날의 세상의 심판이 비슷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성전파괴는 세상의 종말을 예표하는 사건이고, 역사적으로도 그 사건은 종말의 시대를 시작하는 사건이라고 봅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감람산강화에 언급된 여러가지 징조들은 기원 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파괴 직전에 일어난 일들로 그 범위를 한정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성전파괴 때부터 시작해서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나타날 시대적 징조들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감람산강화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미혹, 배도, 사랑이 식어감, 전쟁, 기근, 지진 등이 예수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대를 특징짓는 현상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는 우리가 항상 이런 고난을 겪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천년설에서 주장하는 낙관적인 세계관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주장이 맞을까요? 제자들은 성전파괴 사건과 세상의 종말 둘다에 대하여 질문했고 예수님께서도 그 둘다를 염두에 두고 답변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답을 하기 위해 먼저 마가복음 13장과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대응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그 두 곳에서는 성전이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막13:4)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눅21:7) 이 두 구절에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관한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성전파괴에 대한 질문만 있습니다. 전천년주의자들과 무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약 감람산강화가 세상의 종말에도 관련된 내용이라면 마가와 누가는 황당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세상의 종말과 관련된 그 두 표현을 빼먹음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성전파괴만 다룬 것으로 엄청나게 축소해 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성경에 대한 성령의 영감과 무오성을 믿는 우리는 마가와 누가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의 해석이 잘못됐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사실 3절의 “주의 임하심”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24장 후반부에 대해 설교할 때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고 계신 내용이 세상의 종말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 중에 분명히 밝히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앞에서 여러가지 징조와 대환란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이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때가 기원 후 30년입니다. 그러니까 기원 후 30년부터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그 일들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죠. 실제로 그 일들은 기원 후 70년까지 해서 다 일어남으로써 예수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세대”라는 표현을 30-40년이 아니라 몇 천년으로 볼 수는 없겠지요.

이제 반대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까지 당신 말이 맞다고 칩시다. 그렇지만 3절에 나오는 ‘세상 끝’이라는 표현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오? 그 말은 분명히 세상의 끝을 가리키는 표현 아니오?” 그러나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그 단어가 오역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원어(헬라어)는 ‘아이온’이며 뜻은 ‘시대’입니다. 그런데 흠정역은 이 아이온을 ‘world’로 번역했고 개역한글판도 ‘세상’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끝’이라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번역은 원어의 뜻에 맞게 ‘시대의 끝’이 되어야 합니다. NIV나 ESV 등은 그래서 “the end of the age”라고 옳게 번역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세상의 끝에 대해서 물어 본 것이 아니라 시대의 끝에 대해서 물어 본 것입니다.

이 사실은 본문이 위치한 문맥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앞 장인 23장은 예수님께서 위선적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고 또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율법의 핵심인 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사실 육신의 할례는 받았으나 마음의 할례는 받지 못해서 진정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33-36절에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말하자면 23장은 이방에 빛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에게 이런 역할이 주어졌던 때는 구약시대였습니다. 3절에서 제자들이 “시대의 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 구약시대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구약 선지서 곳곳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이스라엘에게 진노의 날 즉 여호와의 날이 올 것임을 예언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들은 바벨론이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했을 때 일차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23장에서 자기들 세대가 심판받으리라는 것을 듣고 또 24장에서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바로 자신들 시대의 끝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구약시대 즉 이스라엘 시대의 끝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파괴에 대해 질문하면서 동시에 시대의 끝에 대해 질문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구약시대의 멸망으로 세상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누누이 예언하고 있듯이 메시야 즉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24:8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구절은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는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의 뜻은 “이 모든 것은 산통의 시작이니라”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들은 이 산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를 재난이라고 하지 않고 “birth pangs” 또는 “birth pains”라고 바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2 즉 예수님께서는 성전파괴 사건을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일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어머니가 산통 후에 아이를 낳듯이 성전파괴로 옛 이스라엘이 심판받고는 새 이스라엘 즉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기원 후 70년의 성전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은 구속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구약 곳곳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예언했던 심판의 날이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 후에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성경을 해석합니다. 여러분, QT라고 잘 아시지요? QT는 말씀을 묵상해서 자신에 대한 적용점을 찾아내는 것이 주 목적입니다. 그리고 QT에는 많은 장점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QT를 하면서 굉장한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QT방식에 익숙해진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자신에게 적용하기 바빠서, 자신들이 읽고 있는 구절들이 일차적으로는 성경이 쓰인 당시 사람들에게 주어진 메시지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우리의 본문인 마태복음 2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글들이 성전파괴 전에 쓰인 내용이니 일차적으로 성전파괴 전의 상황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메시지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우리 상황을 배경으로 그 내용을 해석하는 일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3절의 “세상 끝”을 우리가 사는 세상의 끝으로 해석하는 식이죠.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기원 후 70년의 성전파괴 사건은 굉장히 중요한 구속사적 사건입니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심판을 얘기하는 구절을 만나면, 그 심판이 우리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기원 후 70년의 성전파괴를 통한 이스라엘의 심판을 얘기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 봐야 합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4-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곧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서 메시야를 사칭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6-8절에서 전쟁과 기근과 지진 등이 있을 것이나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새 시대를 해산하기 위한 시작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9-13절에는 신자들이 박해를 당하고 또 그들이 배도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이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과 사도요한이 서신서 곳곳에서 자신들의 시대에 실제로 배도가 일어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4절에 문제의 구절이 나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감람산강화가 세상의 종말에 관한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 희색이 만면합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끝이 오기 전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고 했는데 성전파괴 사건 전에 과연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느냐는 것이죠. 그러지 않았으니 이 감람산강화에서 말하는 ‘끝’은 성전파괴 때를 가리키지 않고 세상의 종말을 가리킨다는 것이죠. 물론 그 당시 온 지구상에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40년만에 복음이 온 지구상에 전파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당시에 복음이 실제로 온 지구상에 전파되지 않았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고 믿어야 할까요? 우리는 담대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다음과 같이 그런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1:6).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한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1:23).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롬1:8).

골로새서와 로마서는 모두 기원 후 70년 전에 기록되었는데 사도 바울은 분명히 그 때 복음이 온 세상과 만민에게 전파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때 복음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에 전파되지 않았는데 바울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우리가 여기서 바울과 그 시대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이 온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만민이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동아시아가 온 세상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자꾸 우리 관점에서 읽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복음 24:14에서 말하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표현은 오대양 육대주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지역과 민족들에게 전파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이 구절을 보고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서 현재의 모든 민족에게 빨리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15절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면 대환란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은 번역입니다. 제대로 된 번역은 바른성경에서처럼 “황폐케 하는 혐오스러운 것”입니다.3 그리고 황폐케 하는 혐오스러운 것이란, 구약을 잘 살펴보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사람이 살지 못하게 만드는 즉 황폐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우상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거룩한 곳은 말 그대로 거룩한 곳 즉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이 성전에 놓이거나 또는 우상숭배 행위가 성전에서 자행되면 하나님께서 대환란을 통해서 성전을 황폐케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또 넓게 보아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불경한 행위들에 대하여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감람산강화에서, 이러한 행위들이 극에 달하여 성전에 혐오스러운 것이 서면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파괴하실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6절부터는 대환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대환란은 이미 지나갔다는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습니다.4 바로 21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란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여기에서 “지금까지”와 “후에도”라는 표현은 대환란이 역사의 끝에 있지 않고 중간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줍니다. 미래에 대환란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직접 확언하신 것입니다.

물론 역사의 마지막 때도 신자들에게 시련은 있을 것입니다. 새 언약 시대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던 사탄이 잠시 풀려 나서 만국을 유혹하여 그들이 신자들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계20:3, 7-10).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도들을 에워싸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삼켜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의 시련은 기원 후 70년경의 대환란과 비교할 수 없는 조그마한 시련일 뿐입니다. 신자들에게는 마태복음 24장에서 말하는 대환란은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전에는 대환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앞으로 대환란은 없을 것이니 신자들이 안심하고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이 신실하게 살지 않다가 신앙이 약해져서 시련이 닥칠 때 배도하게 되면, 기원 후 70년 경에 배도한 이스라엘이 받은 심판과 세상 마지막 날에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적하는 나라들이 받는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환란보다도 더 끔찍한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본 설교에 제시된 마태복음 24장 해설은 David Chilton의 해석에서 굉장히 큰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 둔다(David Chilton, Paradise Restored, Dominion Press, 2007).

2 흠정역은 “sorrow”라고 오역하고 있다. 바른성경은 “해산의 고통”이라고 바르게 번역하고 있다.

3 ESV에서는 이것을 “the abomination of desolation”이라고 바르게 번역해 놓았다.

4 흔히 대환란은 기원 후 70년경에 이스라엘이 받은 끔찍한 심판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 9절이 말하듯이 대환란은 신자들이 당한 것을 가리킨다. 당시 신자들은 유대인들과 로마에게서 대대적인 핍박을 받았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심판은 대환란이 끝난 후에 일어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마24: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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