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환란은 지나갔다 2

대환란은 지나갔다 2

본문: 마24:29-51

2010년 8월 15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목사

 

지난 시간에는 마태복음 24장 전반부를 다루면서, 이 감람산 강화가 말하고 있는 대환란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 재림 전에 일어나지 않고, 이미 기원 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될 때 일어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는 이방나라에 빛이 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이스라엘이 오히려 우상숭배와 불의를 자행하면서, 그런 죄를 지적한 선지자들을 죽이고 결국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인 데 대한 심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파괴는 이스라엘이 대표했던 옛 시대 즉 옛 언약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대표하는 새 언약 시대가 시작되는 분기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대환란이 미래에 일어난다고 암시하는 듯한 구절이 실제로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24장의 후반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반부와 마찬가지로 후반부 내용을 가지고도 많은 사람들은 대환란이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29절은 예수님 재림시의 천지격변을, 30절은 예수님 재림을, 31절과 40-41절은 예수님 재림시의 휴거를 묘사한다고 주장합니다. 전반부에서처럼 그들의 주장은 굉장히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구절들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먼저 29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구절은 대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구절은 우주적 격변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고 오직 예수님 재림 때에야 가능하니까, 성경에 그 변화 직전에 일어난다고 되어있는 대환란이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일어난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이 무슨 과학책인 것처럼 보면 안 됩니다. 성경은 과학책보다는 차라리 문학책에 가깝습니다. 성경의 많은 글들이 시, 내러티브 등의 문학 양식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별들이 떨어졌다는 표현이 나왔을 때 그것이 꼭 별들이 실제로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인물이 죽었을 때 큰 별이 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구약내용을 잘 알고 있는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성경식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표현을 쓰신 것이 아니고 구약 저자들과 선지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해, 달, 별들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창세기 1장 16-17절을 보면 해와 달과 별들은 땅을 비춤으로써 땅을 다스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것들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많은 생물들이 살아갑니다. 하늘이 땅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그것들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해와 달과 별들은 땅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을 상징합니다. 또 우리는 해와 달에 따라서 일, 월, 년의 시간을 계산합니다. 즉 그것들이 시간을 주관합니다. 그리고 별은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서처럼 특별한 징조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빛을 잃는 것은 그것들에 따라 움직이던 시간의 끝 즉 한 시대의 끝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성경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거나 별이 떨어지는 것은 통치자들이 몰락하고 한 시대가 끝난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들도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을 해와 달과 별들의 변화를 사용하여 표현했습니다. 이사야 13장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인데,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1절). …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이라(6절). …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10절). …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13절).” 또 에스겔 선지자는 에스겔 32:7-8에서 애굽의 멸망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본문 구절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구약을 잘 알고 있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이런 표현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감람산강화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물리적인 우주격변이 아닌, 자신들의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의 멸망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이 몰락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이죠.

“그럼 30절은요? 이 절이야말로 예수님의 재림말고 다른 그 무엇을 나타낼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우리의 반대자들은 묻습니다. 자 그럼 이 문제의 구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이 구절은 예수님 재림시에 인자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려는 징조가 하늘에서 보일 것이라는 뜻으로 많이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렇게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하늘에 있는 징조가 보이겠고” 이 번역을 따른다면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인자가 하늘에 있는 징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대기권 하늘에 인자의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 인자가 있는 징조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승천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원 후 30년에 죽으신 후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오른 편에 앉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만물의 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는 왕이 되신 사실이 공적으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멸망 때에 이르러서야 예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이 심판받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왕이심이 공적으로 선언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자가 하늘에 있는 징조입니다. 인자가 하늘의 보좌에 앉아 있다는 징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하늘에 계심으로써 그 결과가 땅에서 자신을 거부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 30절에서는 이것을 보고 즉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를 보고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예수님 재림시에 지구상의 모든 불신자들이 통곡할 것을 묘사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땅”은 지구 전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고체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구약에서, 바다는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을 의미하고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지역 곧 팔레스타인 땅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서 7장에서 이방 제국들을 상징하는 짐승들이 바다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편 “모든 족속”은 지구상의 모든 민족을 의미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의미합니다. “족속”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부족,’ ‘지파’ 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예수님 재림 때에 지구상의 모든 불신자들이 통곡할 것을 의미하지 않고 기원 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슬퍼하며 통곡할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확실히 예수님의 재림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그 대적을 심판하시는 것을 묘사할 때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19:1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니엘 7:13-14의 인용입니다. 다니엘 7장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보여주신 내용입니다. 그 꿈은 네 마리의 짐승이 차례대로 나타나고 그 후에 인자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에게 가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서의 다른 장들과 7장을 잘 살펴보면 그 네 마리 짐승은 차례대로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입니다. 그리고 그 제국들은 짐승이 상징하는 대로 짐승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짐승들이 가축과 달리 길들여지지 않은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께 길들여지지 않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막강한 힘으로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 짐승인 로마로부터 그 권세를 빼앗으셔서 인자에게 주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일은 기원 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일어났습니다. 로마는 그 후에도 존속했지만 그 후부터는 기본적으로 땅의 권세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광경을 다니엘 7장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남은 짐승들은 그의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12-14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22절)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27절)

결국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30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재림을 가리키지 않고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마26:64). 1세기에 이미 죽은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이 예수님 재림 때까지 살아 있을 수는 없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리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사건이 몇 천년 후의 재림 때가 아니고 그 무리들이 죽기 전 그러니까 자신이 심문받는 시점에서 몇 십년 내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30절에서 인자가 ‘온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인자가 하나님께 ‘가서’ 권세를 받는 다니엘 7장의 내용을 뜻할 수 있냐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에르코마이’인데 그 단어는 ‘오다’와 ‘가다’의 두 가지 뜻이 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30절의 해당 구절은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가는 것을 보리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니엘 7장의 내용과 같아집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31절에서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모을 것이라는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이 내용은 언뜻 보면 ‘예수님 재림 때 천사들이 신자들을 끌어올릴 것이다’ 즉 ‘휴거가 일어날 것이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그렇게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천사”에 해당되는 헬라어 원어는 ‘앙겔로스’입니다. 이 단어는 ‘천사(angel)’라는 뜻도 있지만 ‘사자(messenger)’라는 뜻도 있습니다.2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어떤 말을 전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어떤 경우에는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컨대, 요한계시록 2:1의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의 “사자”는 그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즉 목사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본문 31절의 천사도 하늘에 있는 천사가 아닌 ‘복음 전도자’를 뜻할 수도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재림 때 ‘땅’에 살고 있던 신자들이 들려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31절은 ‘하늘’에서 모은다고 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절은 대환란이 예수님 재림 때 일어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람산강화의 대환란이 예수님 재림 직전의 사건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구절을 들고 나옵니다. 40-41절의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는 구절이 예수님 재림 때의 휴거를 묘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선입견이 들어간 주관적 번역입니다. 원문은 그냥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버린다’는 부정적 뉘앙스는 없습니다. 본문이 남아있는 사람이 환란을 당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하듯이 노아의 홍수 때와 비교하면, 오히려 남는 자가 살아남는 사람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의 가족들은 남은 반면 다른 사람들은 죽어서 사라졌으니까요. 이런 해석은 예루살렘 멸망 때 남겨진 사람은 환란을 피해서 살아남은 사람이고 데려감을 당한 사람은 환란으로 죽은 사람인 사실과 잘 부합됩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마태복음 24장의 감람산강화는 대환란이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감람산강화는 제자들이 성전파괴가 언제 일어나고 또 그 때에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 질문한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내용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일들이 제자들의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대환란은 성전이 파괴된 기원 후 70년경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고 예수님 재림 직전에는 마태복음 24장에서 묘사하는 대환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점점 나빠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요 근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주장에 현혹되어서 비관주의자 또는 패배주의자로 세상을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약속한 대로 세상이 점점 좋아질 것을 소망으로 바라보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힘써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의 내용이 우리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은 최후의 심판 후에 마태복음의 대환란보다 더한 지옥의 고통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대환란과 예루살렘 멸망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도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마24:42). 그리고 개인적인 종말 즉 우리 각자의 죽음이 언제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년일지 혹 내일일지 아니면 한 시간 후일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깨어서 신앙을 지킴으로써 최후의 심판 후의 영원한 대환란을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 본 설교에 제시된 마태복음 24장 해설은 David Chilton의 해석에서 굉장히 큰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 둔다(David Chilton, Paradise Restored, Dominion Press, 2007).

2 사실 천사라는 말 자체가 ‘하늘의 사자’라는 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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