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이 오늘날 특별히 누군가에게는 더우기 와닿는 이유

먼저 글을 쓰기 전, 이 바실레이아 사이트에서 귀한 글을 지속적으로 남겨 주신 한 목사님의 빛나는 수고에 가슴이 멍할 정도입니다….한목사님과 송 장로님 통해 용기내어 오늘 접속하여 글을 싣고자 합니다. 어제 새벽에서 몇 교우들과 나눈 한 강론과 지난 주일 교우들과 함께 드린 예배 중 말씀으로 섬긴 내용 중 일부 섞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다소 긴 글이라고 느껴지시면 다소 긴 호흡으로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경어체로 쓰여지지 않았기에 양해를 구합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신 일이 중요할까?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내(우리)가 저질러 마땅히 질책 받아야 할, 형벌 받아야 할, 저주 받아야 할 내(우리) 삶의 가장 큰 난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죄로 인한 심판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내가 받은 질책, 형벌, 저주를 대신 다 받으셨기 때문이다.

또한, 왜 예수님이 살아나신 일이 내(우리)게 중요할까?  특징적으로 혹은 특정한 쪽과 결부시켜 말하자면, 질병과 죽음 문제로 내내 발목잡히지 않아도 되고, 외부적 자살 충동에 휘둘려 생을 마치지 않아도 되기에 그렇다. 그 본디 이유는 뭘까? 내 인생을 내 능력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전의 삶과는 다른 삶이 내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뿐 아니라 나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여 믿는 순간 말이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태도, 새로운 변화가 점진적으로 혹은 일거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내가 동일시되어 누린 은혜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능력과 동일시 되는 능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의 힘, 능력으로 고단한 생을 지탱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 능력으로 곤란한 삶을 지탱하려 한다. 그 일은 모두 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구원 플랜/경영이 완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온전히 구원하시려는 정교한 프로젝트가 완결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일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들의 죄들을 해결주신 분으로 국한되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죄에 대한 처벌을, 징벌을 받지 않고 다만 저주가 면제 된 채 지옥에서의 끔찍한 삶이 없게끔 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영생을 위해서 오셨다. 더 큰  은혜, 더 큰 혜택, 더 큰 구원을 우리에게 안겨 주시기 위해 오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온 목숨을 다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온 정성을 다해 살아나신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의 문, 구원의 문, 천국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피셔 마샬이란 분은  관련하여 ‘예수님의 무덤 밖에서 무덤을 막은 돌은 그분이 무덤 밖으로 나갈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치워진 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의 현장을 보게끔 하도록 하기 위해서 열려진 것이다’ 란 취지로 말했다.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우리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상태로 우리도 살게끔 하기 위해, 천국을 맛보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돌이 치워졌다고.

그게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죽음 못지 않게 중요한 이유가 된다. 곧 하나님이 나를, 우리를 구원하셨(신)다는 것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해결해주신다는 것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삶을 주셨다는 것을 뜻한다. 용서받은 삶, 해방된 삶 뿐 아니라 풍성한 삶, 영원한 삶을 주신다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이렇듯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최고의 희생이자 최상의 선물이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을 같이 깨달아야 한다. 십자가는 청산해야 할 옛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면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주기에.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갑작스런 변고로 인하여 긴 헤어짐을 갖는 이들에게는 이 부활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소식인가. 또한 정신질환을 앓다가 헤어짐의 상처를 겪은 분들이나 코마 상태로 오랫동안 가족을 알아 보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도 결국 위로가 되는 부분이 아닐까? 몇 년 전 제 장인이 십 여일 동안을 혼수 상태에 계시다가 주님 품에 안기셨다고 믿고 있다.

2009년 11월, 23년 동안 코마상태인 환자가 사실은 23년 내내 의식이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된 사례가 벨기에 학술지에 발표돼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1983년 당시 23세의 학생이었던 롬 하우벤은 교통사고를 당해 코마(Coma: 뇌사상태)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23년 동안 하우벤은 병원 침대에 생명유지 장치를 달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하우벤은 전신마비상태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의식은 있는 상태로 의사나 가족이 하는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 하우벤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 것은 그가 46세 되던 해인 2006년. 벨기에 리에주대학교 신경학 스티븐 로이스(Dr Steven Laureys) 박사가 하우벤의 뇌활동사진을 첨단 장비로 다시 스캔했고, 놀랍게도 뇌는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후 3년 동안 치료를 다시 받았고, 현재는 침대에 설치된 컴퓨터 자판기를 두들겨 대화가 가능하며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하우벤은 “나는 의식이 있다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의사가 내가 의식이 있음을 아는 순간 ‘제2의 탄생’이란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어쩌면 우리 또한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소리 칠 것이다. 나는 천국(아직 새하늘과 새땅의 모델하우스 같은 미완된 상태이기는 하나)으로 향하고 있다고.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지 몰라도 말이다. 그리고 머잖아 우리는 제 2의 탄생을 이곳이 아닌 주님께서 완성시킬 새하늘과 새땅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혹, 코마 상태로 있다가 눈을 감으신 신앙인을 가족으로 둔 분이 있다면 위로해주시라. 성경 말씀을 전해주면서. “주 예수를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사하라 부활초(Sahara Resurrection Plant)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유투브 영상 참조) 이 부활초는 물이 없는 사막에서 생존하느라 오랫동안 죽은 듯 해 보인다. 약간의 습기와 수분으로 연명한다. 그래서 최대한의 에너지 절약을 위해 가지들을 펼쳐서 에너지를 비축하고 씨앗들은 흩기도 한단다. 그렇게 백년 간을 죽은 듯 있다가도, 고랑 물이라도 만나면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놀라운 모습을 보인다. 이전과 현격히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런 부활초는 앞으로 우리들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자연에서 엿보게 되는 탁월한 비쥬얼 장치라 하겠다. 그러니까 분명 우리의 정체성은 죽음을 통과한 후 새 몸을 입는 일을 통하여 지속된다.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의 물리적 한계에 놓인 육체의 연약, 취약을 뛰어넘게 할 것이다. 바울식의 표현을 빌리자면(고전 15:35~44), 썩을 것에서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될 것이고(“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2) 비천한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될 것이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약한 것에서 강한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soma tapeinoseos)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키리라”(빌 3:21) 이 구절이 약속하는 것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우리의 몸이 놀랍게 바뀐다는 것이다. 약해져 죽을, 썩을 몸을 변화시켜 영광스러운 몸, 새롭게 된 몸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오래전 세익스피어는 ‘앞으로 되어질 일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우리의 불완전하고 취약한 몸이 당연히 온전해지고 견고해지는 것으로 대입시켜도 무방하겠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그점을 약속하고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하노라”(고후 51,2) 우리는 분명 낡은 몸, 약한 몸을 벗어나 새로운 몸을 입을 것이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4) 우리는 죄와 무관한, 병과 무관한, 죽음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몸의 한계가 분명 회복될 것이다.

조니 에릭슨타다(Joni Eareckson Tada)의 말은 바로 여기서 호소력이 있다. 옛 올림픽 대회 미국 대표로서의 참전 경험을 갖춘 그녀는 십대 때 다이빙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후, 20년 동안을 고통 가운데 보내야 했다. 그녀는 ‘낮은 몸’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부활한 다음에 입을 몸이 얼마나 큰 소망인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불구가 된 이 몸 어딘가에는 앞으로 내가 변화될 모습을 담은 씨앗이 숨어 있습니다. 근위축증으로 쓸모 없어진 다리를 찬란하게 부활한 몸에 있을 다리와 비교해보십시오. 현재의 마비 상태는 변화될 ‘나’를 더 멋진 존재로 부각시켜 줄 것입니다. 천국에도 거울 같은 게 있다면(꼭 있을 거에요), 내가 거울을 통해보는 모습은 틀림없는 ‘조니’일 겁니다. 훨씬 좋아 보이고, 밝은 모습이겠죠. 지금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는 모습일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형상을 그대로 지닌,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Max Lucado, When Christ Comes 소망있는 기다림, 74쪽).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을 새롭게 하시고, 그분의 것과 같이 만드실 것이다. 우리의 몸이 지금은 취약하고 결함이 있어 어그러져 있지만 그 날에는 곧게 펴지고, 불완전해진 온갖 것들이 온전해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여전히 소망을 굽힐 이유는 없다. 우리가 가진 고통은 단지 이곳에서만일테니까 말이다. 혹 몸의 지체 중 통증을 유발하는 일로 고통스러우신가? 하늘에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심장과 신장이 유독 약하신가? 하늘에서는 매우 강해질 것이다. 기억력이 쇠퇴하고 심지어 알츠하이머 증세까지 있는 것 같은가? 우리가 입을 새로운 몸에서는 그런 걱정, 그런 취약이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뇌, 정신을 가질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맞이하게 될 새 세상으로 향하는 과정과 경로를 납득시켜 준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앞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경험하게 될 영원한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사실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생의 모델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과정으로 이해한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향하기 위한 필요한 경로로 말이다. 이 마치 하룻밤 감기처럼 지나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마치 밤에 자는 잠처럼 한번 잠을 통과하면 새 아침이 찾아 오듯 죽음을 잠처럼 통과하면 영원한 생명이 준비하여 기다라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난, 즉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잠을 잔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차원이 다른 곳에서 생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 언젠가 온 성도들과 함께 새로운 몸과 영을 입는 놀라운 차원의 삶으로 바뀔 것이기때문이다.

“주 예수를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예수님의 부활이 새로운 존재로 덧입으셨듯이, 우리도 새로운 존재로 덧입으며 놀랍게 커밍아웃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현세에서 이러저러하게 질병과 힘겹게 씨름하고 있거나 노쇠함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에게 더할나위 없는 위로와 소망의 원천이 아닐수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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