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과 하나님 나라

성찬과 하나님 나라1

본문: 마26: 26-29

2010년 4월 18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목사

 

지난 번에 성찬에 대하여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찬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매우 깊고 많기 때문에 한번 더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도 잠깐 스치듯이 언급했지만 지난 수세기 동안 사람들이 성찬에 대하여 가졌던 관심은 성찬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였습니다. 즉 성찬 때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전달되는가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은 화체론을, 루터교는 공재론을, 칼빈을 따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설을, 쯔빙글리를 따르는 교회는 기념설을 주장하였습니다.2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주로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이죠. 말하자면 개인으로서의 신자가 어떤 영적 유익을 얻는가 또 어떻게 얻는가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은 이런 개인구원론적 차원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예수님의 성찬식 제정을 다루는 내용 중에 있는 마태복음 26:29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포도주를 새것으로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마신다고 말씀하고 계시죠?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포도주를 새로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사역 덕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 즉 성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에 다시 우리와 만찬을 나누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찬은 하나님나라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나라에서 만찬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28-30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에서 먹고 마실 것을 말하고 있고 마태복음 22:1-14은 천국 즉 하나님나라에서 왕이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9:1-10은 마지막 때에 있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6:29에서 나중에 드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만찬은 이런 잔치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찬식은 예수님 재림시에 하나님나라에서 있을 잔치를 미리 맛보는 의식입니다. 성찬식이 이렇게 하나님나라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찬식을 하나님나라의 특성을 잘 반영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먼저, 성찬식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창조주에 의존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찬식 때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은 무엇인가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우리의 상태를 잘 나타냅니다.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음식을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을 때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못합니다. 이 사실은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으므로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성찬식은 하나님나라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를 나타내 줍니다. 먹이사슬을 보면 먹는 자가 먹히는 자를 지배합니다. 토끼는 풀을 지배하고 늑대는 토끼를 지배하고 호랑이는 늑대를 지배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동식물을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모든 먹히는 자는 먹는 자의 필요를 채워 주는 존재입니다. 모든 동식물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계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찬은 이런 지배구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성찬식 때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먹음으로써 우리가 빵과 포도주가 대표하는 피조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성찬이 약육강식의 피비린내나는 지배구조를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좀전에 말씀드린 먹이사슬을 보면 인간은 동물의 고기를 먹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인이 과연 고기를 먹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식은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강력한 반론에 부딛힙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대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모든 동물을 먹거리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거기 1절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허락이 육식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식생활 형태라고 말한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즉,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육식을 할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육식은 우리가 동물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폭력을 통한 지배입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 즉 아담과 하와가 동물들과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동물들은 인간에게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에게 반역하면서 동물들도 인간에게 반역하게 되었습니다. 추측건대, 동물들이 사람을 죽이는 일도 많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육식의 축복은 동물들의 이러한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책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창조시에는 동물들과 인간이 순종과 사랑을 통하여 조화롭고 평화로운 관계를 이루고 있었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이것이 깨짐으로써 권위의 역전현상이 일어나서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무력이 불가피해진 것입니다.3

그러나 이런 무력을 통한 피조계 통치는 이 세상에서만 허용된 일시적 현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사야 65:17-25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런 무력 통치가 사라진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이에 대한 이사야 11: 6-9의 묘사는 더욱 생생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이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육식은 사라집니다. 사자도 소처럼 풀을 먹고 곰도 암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당연히 인간도 육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는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살생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피조물들간에 완벽한 조화와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뛰어 놀고 어린 아이는 뱀과 장난치며 놉니다. 물론 아름답게 변한 뱀과 말이죠. (참고로 여기의 뱀은 앞에서 말한 이사야 65장의 뱀과 다릅니다. 여기의 뱀은 그냥 뱀이고 65장의 뱀은 사탄을 나타내는 ‘serpent’입니다.4 그래서 65장의 뱀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저주를 받아서 흙을 먹이로 삼게 됩니다. 성경에서 흙을 먹는다는 표현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즉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아무튼 성찬은 그 재료로서 살생이 전제되는 동물의 고기를 쓰지 않고 식물인 빵과 포도주를 씀으로써 조화와 평화가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무력통치의 상징인 육식을 택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통치인 채식을 택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찬식 때 우리는 피조계의 대표인 빵과 포도주를 먹음으로써 우리가 세계를 다스린다는 것을 선포하지만, 육식형태가 아닌 채식형태를 취함으로써 그 다스림이 무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보여 줍니다.

세번째로, 성찬식은 이 땅의 삶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삶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 없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나라를 대표하는 것으로 왜 하필이면 성찬 즉 식사를 선택하셨을까?5 식사가 어떻게 하나님나라에 있을 영광스러운 영적인 일들을 대표할 수 있을까?” 식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 중 가장 기본적인 행위입니다. 그리고 매우 물질적인 행위이죠. 이것은 하나님나라는 기본적으로 물질이 사라지는 이른바 ‘영적인’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장차 임할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던 물질적인 행위와는 완전히 다른 별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행위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를 단지 정화되고 영화된 형태로 할 뿐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예컨대 밥도 먹고 음악도 듣고 스포츠도 즐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의 문화행위를 긍정적으로 보신다는 사실은 성찬식의 재료로서 빵이 쓰신다는 사실에 나타나 있습니다. 만약 성찬식이 첫번째와 두번째 요점인 인간의 창조주에 대한 의존성과 인간의 피조세계 통치만 나타낼 거라면 예수님께서 밀을 쓰실 수도 있었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것을 갖다 놓고 먹을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빵은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아닙니다.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농사를 짓는 기술과 빵을 만드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또 그런 것들이 원활히 이루어지려면 사회도 이루어야 하고 제도도 만들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문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이렇게 문화가 중시된다는 사실은 인류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아무 문화 없이 시작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자연 그대로의 상태였습니다. 옷도 없었고 집도 없었고 먹거리도 모두 자연 그대로의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술도 문학도 제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해 놓은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그 곳에는 ‘동산’이 아니라 ‘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의 24절과 26절을 보면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을 가지고 그 성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이사야 60장의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그 장은 각 나라들의 문물이 하나님나라로 들어옴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문화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또 이 땅의 문화가 새 하늘과 새 땅에 이어진다는 것을 성찬식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식에는 종말론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찬식에는 일을 끝낸 후에 따라오는 안식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찬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시는 것을 상징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찬식이 단지 이런 영적 양육만을 나타낸다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주 대신에 포도즙을 사용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포도주뿐만 아니라 포도즙에도 양분이 듬뿍 들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를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포도주가 포도즙 또는 포도쥬스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포도즙이나 포도쥬스는 영양공급이나 맛을 위해서 먹습니다. 그러면 포도주는요? 물론 영양공급을 위해서 특히 맛을 위해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기본적으로 술입니다. 술은 무엇인가를 축하할 때 마십니다. 그리고 술은 마시면 취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끝내고나서 마십니다. 포도쥬스는 아침에도 마실 수 있지만 포도주는 아침에는 마시지 않습니다. 일을 끝낸 후 즉 저녁에 마십니다. 물론 휴일에는 점심 때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평일에 일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아무 것도 안 한 사람이 한낮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아주 비정상적인 행태입니다. 이렇게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는 일을 끝낸 것을 축하하면서 안식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끝마친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실 잔치에 참여하여 포도주를 마시면서 안식을 맛볼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사야 25:6에도 나와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성찬식의 포도주는 이러한 기쁨과 안식을 상징합니다. 저는 이것이 성찬식에서 먼저 빵을 먹고 그 다음에 포도주를 마시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일(빵)을 하고 다음에 안식(포도주)이 있는 것이죠. 먼저 죄와 싸우면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나서야 안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포도주는 하나님께서는 효율성 또는 경제성만 중시하는 분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사실 포도주는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은 아닙니다. 빵처럼 영양공급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죠. 마시고 그저 즐거워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분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저 즐거워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피조세계를 우리에게 일만 하라고 주시지 않고 즐기기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식의 포도주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안식이 우리의 힘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 때에 포도주를 마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바로 앞에서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구약에서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어기면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레위기 10:8-9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이런 금지명령이 내려진 이유는 구약 때는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0:4이 말하는 대로 구약제사의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우리 죄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성취하셔서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10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구약의 제사는 단지 실체의 그림자일 뿐이었으므로 온전한 안식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사는 실체 자체였으므로 온전한 안식을 가능케 하였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이미 그러나 아직’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결정적이었지만 그 효력과 결과가 완전히 나타나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서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찬식 때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 때 누릴 즐거움과 안식을 미리 맛보는 의식입니다.

성찬식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기억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만이 성찬식이 가지는 의미의 전부가 아닙니다. 성찬식은 근본적으로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하는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목적이 무엇인가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 개개인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함께 이뤄나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목표로 했던 이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을 잘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성찬식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음으로써만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나라의 구성원인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적인 존재임을 알려 줍니다. 또 하나님나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되 그 통치가 무력을 통한 다스림이 아니고 사랑을 통한 평화의 다스림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성찬식은 하나님나라의 삶이 이 세상의 삶과 동떨어진 형태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식은 지금 이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분투가 끝이 있고, 그 마지막 때에 즐거운 안식이 있으며 그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역때문에 가능함을 보여 줍니다. 성찬식에 담겨 있는 이 놀라운 진리가 여러분이 성찬식에 임할 때마다 되살아나서 여러분의 심령에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1 Peter Leithart, Blessed are the Hungry, 157-186 참고하였음.

2 화체론: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 공재론: 예수님의 육체가 빵과 포도주의 안에, 아래에, 또 그것들과 함께 임재하신다는 주장. 칼빈의 견해: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에 영적으로 임재하셔서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심. 쯔빙글리의 견해: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상징일 뿐이고 다만 성찬참여자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유익을 얻게 됨.

3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사형제도를 허락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4 창세기 3장에서 하와를 유혹한 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 옛뱀 등은 모두 이 serpent이다. 이 점은 영어성경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5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한다는 생각때문에 성찬의 이미지를 장례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찬은 기본적으로 식사이다. 성경은 성찬을 가리킬 때 “주님의 상” 또는 “주님의 만찬”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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