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본문: 마4:18-25

2015년 3월 8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목사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일이 제자들을 부르신 일이었습니다. 자신한테 배워서 자신의 사역을 이어갈 사람들을 모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때 부른 네 제자들의 직업이 모두 어부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어부들을 사도들로 부르셨을까요? 사도들이 복음으로 사람들을 낚는 것과 어부들이 그물로 고기를 낚는 것이 모양이 비슷하니까 상징적인 의미에서 어부들을 택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어부라는 직업이 당시 고귀한 직업이 아니었으니 복음이 낮은 자에게 임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택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에 사도직의 성격을 잘 보여 주면서도 고귀하지 않은 직업에는 어부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양치기는 영혼을 돌보는 사도직의 성격을 잘 표현하면서도 고귀하지 않은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굳이 사도로 어부들을 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런 의문은 구약 시대에 백성을 이끌던 사람들(즉 선지자들이나 왕들) 중 직업이 어부였던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보면 더 커집니다. 예를 들어 사울 왕과 엘리사 선지자의 직업은 농부였고 다윗 왕과 아모스 선지자의 직업은 양치기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선택하는 데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와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셨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들의 직업을 잘 살펴보면 구약 시대의 직업은 땅에서 하는 일이고 신약 시대의 직업 즉 어부는 바다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상징체계를 따르면 땅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바다는 이방을 상징합니다.1 이런 이유로 구약 시대의 사역자들은 이스라엘 내에서 사역을 했으므로 땅에서 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 선택된 반면에, 신약 시대의 사역자들인 사도들은 그 역할이 주로 이방인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 선택되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면서 부르시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래도 그렇지 예수님을 언제 봤다고 그렇게 바로 따를 수 있었을까요? 마태복음에는 이 네 사람과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처음 만난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에는 이 네 사람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42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 두 명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둘 중 하나는 저자인 요한 사도가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자신을 가리킬 때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특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 무명의 제자는 요한 사도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안드레인데 예수님을 만나 보고 그 분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고는 자신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도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알고는 틀림 없이 자신의 형제 야고보를 예수님께 데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오늘 본문의 사건 한참 전에 세례 요한을 매개로 해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요1:40-42). 그래서 메시야가 곧 오실 거라고 선포하고 다니던 세례 요한을 따라 다니다가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은 일하는 것과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을 병행하다가 결국 예수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며 따르라고 하자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게 되었습니다. 사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굉장히 열심이었습니다. 성경을 잘 살펴 보면 그들이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시던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했을 것입니다(요1:44; 막1:21, 29). 이런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즉각 반응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열정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이 그물 또는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굉장한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직업과 가족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경 구절들 때문에 한국 교회에는 목사가 되려면 직업은 물론이고 가족까지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가족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듯이 고 박윤선 목사님은 박형룡 박사님과 더불어 한국 보수 신학계의 아버지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분의 따님 한 분이 ‘목사의 딸’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책 내용은 주로 아버지인 박윤선 목사님의 가정생활에 관한 것인데 그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지금 한국 교계에 매우 큰 파장을 낳고 있는 중입니다. 그 내용 중 하나가 그 분이 가족부양은 부인에게만 맡겨 놓고 자신은 책 읽고 연구하는 일에만 몰두해서 가족들이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박윤선 목사님도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가족의 생계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신실한 목회자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 자녀들이 무책임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신앙을 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그러면 목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가족의 생계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결해 주실까요? 목사는 가족의 생계에 무관심해도 될까요? 성경은 이런 생각을 지지할까요?

오늘 본문은 ‘버려 두고’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야고보와 요한이 꼭 늙고 힘 없는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것같은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의 아버지는 많이 늙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통 오늘 본문에서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따를 때 나이가 22세 정도로 추정을 하는데, 그렇다면 아버지의 나이는 50세가 못 되었을 것입니다.2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는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과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1장 20절에 따르면 그들이 아버지를 두고 떠날 때 그는 품꾼들과 같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품꾼들을 고용할 만큼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가족들의 생계를 나 몰라라 하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자식들이 연로한 부모를 경제적으로 부양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돈을 하나님께 바쳤다고만 하면 부모님을 부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마15:1-6). 그리고 바울 사도도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배반한 사람이고 불신자보다 더 악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딤전5:8).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가족의 생계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족을 경제적 곤궁에 빠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오해와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네 제자가 버린 것은 가족이 아니고 자신들의 직업적 성공과 경제적 안락함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호수에서 조업하던 어부들은 부유층은 아니었어도 경제적으로 꽤 안정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농부들보다 잘 살았다고 하니 그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누렸을 것입니다.3 그러니까 그 네 제자들은 이런 안락함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들처럼 안락함을 버리고 있습니까?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들의 꿈과 안락함을 포기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열정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과 달리 이미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 덕분에,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그들보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고, 우리가 구하기만 그들보다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그들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 타 오르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처럼 우리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있습니까?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복음’ 하면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서 천국(heaven) 가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면 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구원 받는 것과 병 낫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잘 알듯이 병이 낫는다고 구원 받아서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병이 낫지 않는다고 구원 못 받아서 천국 못 가는 것도 아닌데, 예수님께서는 왜 병 고침이 복음과 연결돼 있는 것처럼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병을 고치셨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전파하셨던 복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셨던 것은 ‘천국’ 복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천국)가 가까이 온 것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어디서 알게 되셨을까요? 당연히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을 말하고 있는 당시의 성경 즉 구약에서 얻으셨겠지요. 그러면 구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대표로 한 구절만 보겠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35:1, 5-6)

이 구절에 따르면 천국 복음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단지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 가는 것 정도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하나님 나라는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도 새롭게 되고 세상도 새롭게 되는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실 때 예수님의 머리 속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꿈 꾸었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세상, 이 땅이 회복되어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는 세상, 모든 약하고 아픈 사람들이 회복되어 기뻐 뛰고 즐거워하는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세상이 앞으로 올 것이라고 외치면서 그 맛보기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오기를 애타게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마음이 뜨겁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처럼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그런 세상을 맛 보게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애타게 사모하게 하고 있습니까?

1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곳을 가리킬 때는 ‘땅’이라는 말을 쓴다(예: 거룩한 땅). 그러나 이방세계를 가리킬 때는 ‘바다’라는 말을 쓴다. 예를 들어, 다니엘서 7장 2-3절에서는 바다에서 네 마리의 짐승이 나왔다고 말하는데 이 짐승들은 이방나라들(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을 상징했다. 이 해석은 James B. Jordan을 따랐다.

2 예수님께서는 기원 전 4년에 태어나서 기원 후 30년에 돌아가셨고, 요한 사도는 기원 후 6년에 태어나서 100년에 죽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기원 후 28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3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Matthew, 2009, p. 151.

2 thoughts on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1.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성경을 좀더 꼼꼼하게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그동안 수없이 봐 왔던 말씀들이
    완전 새로운 내용으로 다가올 때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진리의 자유함을 선물 받는 기분이 듭니다.

    오늘 말씀에서
    4명의 제자와 예수님의 만남 장면과
    아버지를 버려 두고 갔던 장면은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훨씬 이치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 구절 하나를 믿고
    가장의 역할을 소홀히 하면서도
    안심해오셨던 목사님 아버지들에게
    이 설교를 보여드리고 싶네요.

    1. 저도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성경을 좀 더 꼼꼼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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