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다

본문: 마3:13-17

2015년 1월 18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나아 온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세례를 주면서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자신보다 훨씬 권능이 크신 분이 뒤에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그 ‘권능이 크신 분’인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동안 갈릴리 나사렛에서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시다가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세례를 받은 보통의 사람들처럼 세례를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요청에 세례 요한은 당황하면서 그러시지 말라고 극구 만류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에게서 세례를 받아야지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세례를 받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친척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서로 친척이었기 때문입니다(눅1:36). 그러니까 사는 곳은 유대와 갈릴리로 서로 달랐지만 서로의 존재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특히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았을 것입니다. 전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엘리사벳은 태중의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불렀습니다(눅1:43).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엘리사벳은 주님의 길을 예비할 아들 세례 요한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시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자신은 그 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존재인데 그 분이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다니요? 세례는 당연히 영적 질서상 지위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베푸는 것인데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높은 분에게 세례를 베풀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그러시지 말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만류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 것이 무슨 의를 이룬다는 것인지 추가언급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의를 이룬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심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세례로 표현한 것도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 일조합니다(막10:38-39). 즉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죄인들과 같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고, 그 동일시의 결과 예수님께서 나중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것이며 그 대속의 결과로 죄인들이 의롭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가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므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좀 부족한 해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문에서는 그냥 ‘의를 이룬다’라고 하지 않고 ‘모든 의를 이룬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의가 아니고 모든 의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루다’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는 지금까지 ‘이루다’라는 말을 구약시대에 있었던 일이나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성취한다’는 뜻으로 써 왔습니다(1:22; 2:15, 17-18, 23). 따라서 마태는 오늘 본문에서도 ‘이루다’를 똑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모든 의를 이룬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뜻하신 것은 구약시대에 있었던 모든 의들을 자신이 성취하리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는 여러가지 의로운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세, 다윗, 엘리야, 다니엘 등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로서 많은 의로운 일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는 불완전한 의였습니다. 누군가가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채우기 전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성에 차지 않는 의였습니다.1 이렇게 완전하게 채우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실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성 때문에 채우지 못했던 불완전한 의를 예수님께서 가득 채우셔서 완전하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홍해에서 세례를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구약시대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 오시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을 시작하려는 예수님을 강건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고통과 고난 때문에 강한 힘과 인내와 용기와 위로가 필요한 사역을 앞둔 예수님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강건케 하신 것이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으므로 강건케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연약한 인간이기도 하셨습니다. 죄를 짓지는 않으셨지만 보통의 인간들처럼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큰 시련 앞에서는 두려움에 떨기도 하셨습니다(눅22:41-44).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역을 시작할 때 성령님의 능력을 입은 것처럼 예수님도 성령님의 능력을 입으셔야 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그들의 세례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세례 받고 나서도 성령님을 받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받는 세례와도 달랐습니다. 우리는 세례 받을 때 성령님을 받지만(즉 성령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에 별도로 성령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세례는 일반인의 세례와 다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한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와 자신을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상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셨습니다. 이스라엘도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나서 나중에 오순절에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원 후 70년에 심판을 받아서 죽었다가 참 이스라엘인 교회로 부활하였습니다.2 예수님의 임무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사명을 다시 맡아서 완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고는 그 사명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의 리더의 길을 그대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달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실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은 세례를 받은 후(즉 홍해를 건넌 후, 고전10:1-2 참고) 앞으로 감당할 사명에 도움이 되도록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 율법을 잘 지키면 주어진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은 그들의 마음판이 아닌 돌판에 새겨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고 결국은 그 사명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님을 받으셨습니다. 율법을 마음판에 새기시는 성령님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중 자신의 조상들처럼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의지한 사람들은 사명에 실패해서 결국 기원 후 70년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예수님을 믿어서 오순절 때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은 사명에 성공해서 기원 후 70년 심판을 면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으니 오순절 때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옛 이스라엘과 달리 사명에 성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복락에 참여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님께서 예수님에게 임하신 후에 하늘에서 성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로 결심하실 때 그것이 쉬웠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셨으니까 쉬웠으리라 결국은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실 것을 아셨으니까 쉬웠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자신이 감당할 고난을 생각하면 선뜻 나서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마도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셨을 것입니다. 어디 자신이 그 사명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도 열심히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고민의 일면을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자신이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신 사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눅22:41-44). 그러나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 두렵고 고단한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정하시고 그 첫걸음으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이 이 결단을 한 것을 기뻐하시는 내용인 것입니다.3

우리도 메시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4 그러므로 메시야 예수님에게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골1:24).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막10:29-30; 마5:11). 예수님처럼 심한 고난은 아니지만 우리도 상당한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닥쳐올 무시무시한 고난을 미리 알고도 기꺼이 그 짐을 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다”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오늘 본문에 ‘이루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 πληρόω의 뜻은 ‘가득 채우다,’ ‘완성하다’이다.
2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예수님 재림 때 세상이 심판 받아서 죽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인성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영화되어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는데, 우리도 세상도 예수님 재림 때에 부활해서 완전해질 것이다.
3 여기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고만 봐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다(출4:22; 시2:7; 삼하7:14).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성자(聖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도 하지만 메시야로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내 사랑하는 아들’에서 아들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겠지만, 당시 그 말을 들은 당사자인 세례 요한은 메시야로서의 아들 외의 다른 뜻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후에 그가 예수님께서 오실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문의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으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4 메시야(히브리어)와 그리스도(헬라어)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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