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식 이해 3: 구약 제사제도와 예배

본문: 레1:1-9
2010년 1월 10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지지난 시간에는 예배가 언약구조와 관계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구약의 제사제도 중 폐지된 것은 동물제사이지 우리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는 폐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구약제사제도와 예배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구약 때는 공적인 예배가 제사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제사절차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우리의 상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흠 많고 죄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만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도 구약의 제사제도와 언약에 대한 이해가 우리만큼 깊지 않았지만 현재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와 거의 같은 형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실천은 하고 있었지만 정확히는 알지 못했던 사실, 즉 구약의 제사제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제사의 종류는 몇 가지입니까? 다섯가지입니다. 각각 무엇입니까? 레위기 1장에서 7장까지에 나오듯이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이 중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에 대하여 죄를 범하는 등의 일이 있을 때만 드리고 소제는 항상 번제에 얹어서 드리기 때문에, 기본적인 제사는 속죄제, 번제, 화목제 세 가지입니다.

그럼, 이 세가지 제사 각각은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말 그대로 속죄제는 우리의 속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죄제 때는 다른 제사 때와 달리 제사장이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막 안에 들어가서 성소 휘장에 뿌리고, 또 분향단 뿔들에 바르거나(레4:5-7) 번제단 뿔들에 바릅니다(레4:25). 그리고 화목제 때는 다른 제사와 달리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로 바친 고기의 일부를 하나님 앞에서 먹습니다(레7:15-18).

그럼, 번제는 어떻습니까? 번제는 속죄제나 화목제와 달리 이름에 그 목적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름이 잘못 번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이름은 전에 말씀드렸듯이 승제(昇祭)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히브리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올라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제물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른 제사와 달리 제물을 조각조각 쪼개고 그 전부를 번제단 위에서 태웁니다(레1:6-9).

이 세가지 기본적인 제사들, 즉 속죄제, 번제, 화목제는 각각 우리 예배순서 중 죄의 고백과 죄사함, 말씀을 통한 변화, 성찬과 상응합니다. 왜 속죄제가 죄사함과 연결되고 화목제가 성찬과 연결되는 지는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번제가 말씀을 통한 변화와 연결되는 지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본문을 살펴보고 나면 이 또한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흥미롭게도 구약에서 이 세 제사를 한꺼번에 드릴 때는 우리의 예배순서와 똑같이 속죄제(죄의 고백과 사함), 번제(말씀), 화목제(성찬) 순서로 드렸습니다. 예컨대,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 위임식을 할 때도 이 순서로 제사를 드렸습니다(레8). 구약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먼저 죄사함이 있고,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변화가 있고, 그 다음에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속죄제는 속죄, 번제는 거룩한 변화,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각각 초점을 두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사실 이 세 가지 요소는 각 제사에 다 들어 있습니다. 다만 강조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제 이 세 제사들의 기초가 되는 제사인 번제의 절차를 통해서 구약제사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번제가 드려지는 번제단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번제단은 하늘과 땅, 시내산, 성막 등 세 가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번째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선언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닌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계시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후 구절에서 물질적 하늘, 즉 궁창은 1절의 땅에서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에 자신이 계신 하늘, 궁창, 그리고 땅을 만드셨습니다. 이 중 땅은 우리가 살도록, 궁창은 자신이 계신 하늘을 상징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세 영역은 성막 구조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 계신 하늘을, 성소는 궁창을, 성막 뜰은 땅을 상징합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과 천장에 하늘 영역에 속하는 존재들인 그룹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또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빛(셰키나)이 항상 있었고 성소에는 궁창에 떠 있는 별을 상징하는 등대와 하늘 즉 궁창에서 떨어진 만나를 상징하는 진설병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편 땅을 상징하는 성막 뜰에는 번제단이 있었는데, 이것은 지상에 있는 어떤 산을 상징합니다. 그 산은 바로 시내산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타락 후 그들은 그 곳에서 쫓겨났고 에덴 동산마저 노아의 홍수 때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지상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에, 인간을 자신의 임재로부터 쫓아내셨던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기 위해서 지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내산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서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산 꼭대기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무시무시한 현상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즉, 천둥과 번개가 치고 맹렬한 불과 자욱한 구름이 있어서, 백성들은 산기슭에만 머물 뿐 산을 오르지 못하고 모세만 산에 올라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도, 백성들은 여전히 산기슭에만 머물고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미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만 산에 올라갑니다. 하지만 그들도 산 중턱까지만 올라가고 모세만 홀로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것은 성막을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산인 시내산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성막에서 제사를 드릴 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고, 제사장들은 성소까지만 들어갈 수 있으며, 오직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뜰은 시내산의 기슭, 성소는 산중턱, 지성소는 산꼭대기가 되는 셈입니다.

또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희생제물의 피 절반을 그 제단에 뿌립니다. 이어서 언약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낭독하고 그들이 언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자 나머지 절반의 피를 그들에게 뿌립니다. 이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는 바로 다음에 모세가 한 말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고 있는데 언약을 맺는 당사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를 뿌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는 어떻게 뿌릴까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니 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곳인 시내산에 뿌려야 합니다. 그러나 시내산은 너무 커서 피를 뿌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내산의 모형인 제단에 뿌린 것입니다. 따라서 시내산 아래의 제단은 시내산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제단을 옮겨 다닐 수 있게 만든 것이 성막의 번제단입니다. 결국 번제단은 시내산을 상징하고, 또 시내산이 상징하는 성막의 구조를 상징하고, 결국 성막의 구조가 상징하는 하늘과 땅의 구조를 상징합니다. 즉 번제단 꼭대기에 오르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의 본문을 살펴볼까요? 2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물’은 히브리어로 ‘코르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카라브’라고 하는 동사와 어근이 같은데, 이 동사의 뜻은 ‘가까이 가다’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의미하는 셈입니다. 제사가 단지 동물이 우리 대신 죽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3절부터는 수송아지를 번제로 드리는 절차가 나옵니다. 먼저 3-4절에 보면 송아지를 회막 문 앞, 즉 성막뜰로 끌고 가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송아지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이것은 송아지가 자신을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송아지가 자신의 죄를 대신 짐으로써 자신의 죄가 대속되는 것입니다.

5절에는 제사자가 송아지를 잡는 절차와 제사장들이 그 피를 회막문 앞 제단, 즉 번제단에 뿌리는 절차가 나옵니다. 이것은 앞에서 제가 말씀드렸던, 모세가 시내산 아래에 있는 제단에 피를 뿌리는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피뿌림이 실제로는 시내산에 피를 뿌리는 것을 의미했고 그 피뿌림을 통해서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제사장들이 번제단에 피를 뿌림으로써 제사자가 번제단에 올라가 그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송아지가 죽고 그 피가 뿌려져서 제사자의 죄가 속함을 받는 절차는 우리가 예배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는 것에 상응합니다.

6-9절에는 제사자가 송아지를 잘게 쪼개고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는 절차가 나옵니다. 이것은 제물이 번제단 위에서 태워질 것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제물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씻고, 잘 타도록 잘게 쪼개는 것이죠. 다음에 제사장들은 미리 떼어냈던 송아지의 머리와 기름 그리고 쪼개진 부분과 깨끗하게 된 내장과 정강이를 번제단 위에 놓고 태웁니다. 그러면 냄새가 위로 올라가고 이것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그러면 이 절차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앞에서 번제단은 하늘과 땅, 성막, 시내산의 구조를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번제단의 꼭대기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이 되고, 지성소가 되며, 시내산의 꼭대기가 되는 셈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됩니다. 사실 외관상으로도 시내산 꼭대기와 번제단의 꼭대기는 비슷합니다. 시내산 꼭대기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도록 불이 있었고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번제단에는 항상 불이 타도록 되어 있어서 꼭대기에는 항상 불과 연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심을 나타냅니다.

항상 타고 있는 이 불이 제물을 태우게 됩니다. 7절에 보면 제사장들이 꺼져 있던 제단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기 6장 12-13절에 보면 제사장은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항상 불을 피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번제를 드릴 때마다 새로 불을 피우면 안 되는 것이죠. 이것은 처음에 피워졌던 불이 계속 있어야 하고 이 불이 제물을 태워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누가 처음에 이 불을 붙였을까요?

레위기 10:1-2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자신들의 향로에 자신들이 불을 붙여서 하나님께 나아갔다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불로 타 죽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향단과 번제단에 불을 처음에 붙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번제단에서 항상 타고 있는 불은 하나님의 불이고 거기서 제물을 태우는 불도 하나님의 불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태우시고는 그 향기를 맡으시는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이와 관련하여 레위기 3장 11절과 16절에는 번제단 위에서 태우는 제물이 하나님의 음식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자가 바친 제물이 하나님의 음식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제물이 대표하는 제사자 자신이 하나님의 음식이 됨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먹는 행위는 종종 먹는 주체와 객체가 하나됨을 뜻합니다. 성찬식 때도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우리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서 교제를 나눕니다. 이로 미루어 번제에서 제물을 태워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는 절차는 하나님께서 제사자를 받아들여서 교제를 나누심을 상징하고, 이는 곧 우리 예배의 성찬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사자가 제물을 잘게 쪼개는 절차는 예배순서의 무엇에 해당되겠습니까? 당연히 성찬 전에 우리가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적합하게 변화되는 것을 뜻하겠지요. 이는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우리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까? 정말 그렇다면 신자들은 다 관절염 환자가 될 것입니다. 이 표현은 말씀이 하는 일을 구약의 번제에서 각을 뜨는 절차와 연결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표현을 사용해서, 번제 때 각을 뜨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가리켰던 것은 예배 때 성경봉독과 설교가 우리의 심령을 찔러 쪼개면서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구약의 제사제도, 특히 번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 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 제물에게 안수해서 죽인 다음 잘게 쪼개서 번제단 위에 놓고는 불로 태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는 기뻐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배 때 죄를 고백해서 죄사함을 받고 우리의 옛사람이 죽은 다음,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마침내 하나님께 열납되어 성찬으로 교제를 나눕니다. 이것이 성경이 명시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예배의 각 순서를 따라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 절차에 두신 뜻이 어떤 것인지를 잘 깨닫고 더욱 의미있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