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식 이해 2: 폐지 혹은 성취?

본문: 마5:17, 요4:1-26
2009년 12월 27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지난 시간에는 예배의 목적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기초는 언약인데, 이 언약은 본래 삼위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원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간에 누리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교제 가운데 우리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관계의 원리, 즉 언약을 통해서 우리가 계속 성화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화의 기본 수단이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이며, 그래서 예배의 구성요소가 언약의 구성요소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예배가 왜 언약갱신의식인지를 말씀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아담언약,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모세언약 등의 많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러한 언약들은 각각 앞의 언약들을 갱신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구속사적으로 이러한 굵직굵직한 언약들이 있다는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소에는 하나님과 언약갱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구속사에 기록된 큰 언약들은 새로운 언약갱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진전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백성들은 평소에도 제사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계속 언약갱신을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죄성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계속 깨뜨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예배가 언약갱신의식이고 따라서 우리의 예배는 구약의 언약갱신의식인 제사제도를 따라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살펴 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구약의 율법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구약의 제사제도와 우리 예배의 관계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구약의 율법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대한 대표적 오해 중 하나가 구약 율법은 현재 오늘에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심하게 되면 세대주의, 재세례파 등이 되고 비교적 온건하게 되면 침례교가 됩니다(물론 장로교 안에서도 이런 오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구약시대 다르고 신약시대 다르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침례교인들은 신약시대의 세례가 구약시대의 할례를 대체한다는 점을 소홀히해서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두 제도간의 연속성을 인정한다면 구약 때에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었으니 신약 때에도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야겠지요. 한편 대부분의 장로교나 개혁교회도 정도는 약하지만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원리간의 연속성을 소홀히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구약 때에는 아이들도 유월절 만찬에 참여하였는데 신약 때에는 아이들이 유월절의 대체제도인 성찬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이 신약시대에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공통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의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 우리는 구약의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상이 그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구약의 율법에는 의식법, 사회법(시민법), 도덕법이 있었는데, 이 중 의식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폐지되었고 사회법은 현재의 상황에 맞지 않으니 폐지되었으며 남은 것은 도덕법뿐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의 제사제도, 할례, 유월절, 초막절 등의 의식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취하셨으니 더 이상 우리가 지킬 필요가 없고, 지붕을 만들 때는 둘레에 난간을 만들라는 것 등의 사회법은 우리 현실에 맞지 않으니 지킬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현재도 지켜야 할 것은 십계명 같은 도덕법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구약의 제사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고 따라서 현재의 우리 예배의 형식을 구성하는 데 아무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합니다. 제사제도를 조금이라도 참고할라치면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역사를 되돌리는 것이라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하는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현재의 예배형식에 구약의 제사제도를 참고하는 데는 또 다른 제약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은 물질적이고 신약은 영적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제도, 절기, 정결법, 음식법 등 많은 형식과 제도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신약시대에 나타날 무형의 영적인 것들을 예표하는 물질적인 것들이라고 보는 것이죠. 따라서 구약시대의 형식들을 조금이라도 참고하려고 하면 그것은 구속사를 뒤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비난받게 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성경해석들로 자신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4:24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나눈 대화 중의 일부인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은 영적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내용을 근거로 신약시대의 예배는 내용이 중요하고 우리의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편만하게 퍼져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예배의 형식이 구약의 제사제도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점을 다음 시간에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럼, 요한복음 4장 24절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앞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의 한 마을인 수가에 이르게 되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사이에 한 우물가에서 마침 물길러 나온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 이에 그 여인은 유대인이 자신들이 업신여기는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청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가 자신이 주는 물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생수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15절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도 예수님께서 의미하는 생수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복잡한 남자관계를 드러내심으로써 자신이 보통 사람이 아니고 자신이 줄 물이 보통 물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십니다.

이제서야 뭔가를 깨달은 여인은 자신이 궁금해하고 있었던 것을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 즉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의 그리심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배는 오직 한 군데, 즉 예루살렘의 시온산에서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시다시피 사마리아인들도 모세오경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2장 10-14절 말씀,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평안히 살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실 곳, 그 한 곳에서만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한 곳이 어디인지는 유대인들과 의견이 달랐습니다.

우리 성경을 보면 성전을 예루살렘에 세우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은 사무엘하와 역대상의 ‘오르난의 타작마당 사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모세오경 후의 구약성경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루살렘에서만 하나님께 예배해야 된다는 것을 믿을 이유가 없지요. 그리고 사마리아판 신명기 27:4-7에는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거든 그리심산에 제단을 쌓고 거기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예배는 그리심산에서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여인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1-24)

자, 여기 24절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와는 달리 형식에 관계없이 내용과 마음을 중시하는 예배를 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구절을 개역한글판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번역함으로써 이런 해석을 부추겼습니다. 즉, 신령한 마음으로 진정을 담아서 예배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그러나 문맥을 보십시오. 21절에서 예수님은 장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24절의 예수님의 대답도 장소와 관계되어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예수님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마리아인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예배장소로 예루살렘의 시온산을 택하셨는데 그 명령을 어기고 다른 곳, 즉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자신들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구원은 유대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더 나아가십니다. 새 시대가 오는데 그 때는 사마리아의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시온산도 아닌 곳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여기서 ‘영’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는 ‘프뉴마’인데 이 단어는 ‘영’과 ‘성령’ 두 가지로 다 번역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들은 ‘영’으로 번역했는데 저는 두 가지 뜻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표현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다’라는 뜻과 ‘하나님은 성령님이시다’라는 뜻 둘다를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물질적인 존재처럼 어느 한 장소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즉, 원래는 그리심산에도 예루살렘의 성전에도 갇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성막 또는 성전에만 계셨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성막을 완성하였을 때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곳에 성령으로 오셔서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만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예수님께서 오시면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비둘기처럼 임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에 가야 했는데 이제는 참성전이신 예수님에게 가면 되도록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성전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날 성령님을 보내셔서 제자들에게 충만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과 또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 사람들이 새로운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즉, 그들이 성령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예수님의 몸, 즉 교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는 예수님을 찾아가 예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이제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장소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만 있지 않고 신자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4절의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성령으로 예배한다,’ ‘성령님이 계시는 곳에서 예배한다’고 해석해야 됩니다. 이 구절은 신약에서는 형식없이 소위 ‘영적으로만’ 예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구약시대 때 성전에 임하여 계시던 성령님께서 교회에 오심으로써 성전의 역할을 이제 교회가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예배 드리던 방법, 즉 제사제도는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완전히 폐지되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중요한 역할을 계속 할까요? 이에 대하여는 구약과 그리스도, 즉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한 마디로 정의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사역이 율법을 폐지한 것이 아니고 성취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제사제도도 예수님의 사역으로 폐지된 게 아니고 성취된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잘 다루고 있는 히브리서도 이 문제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10장 1절은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신약시대에 나타날 실체의 예표란 말씀입니다. 또 9장 9절은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번역은 원문의 뜻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원문의 뜻은 ‘이 장막은 현재를 위한 상징이니’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장막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9장 1절부터 8절까지 보면 그것이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성막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아가 포괄적으로 성막과 그 안에 있는 각종 기구들과 도구들,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렸던 모든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현재를 위한 상징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제사제도는 어떤 의미에서 현재를 위한 상징일까요?

10절 이하를 보면 구약의 제사제도가 예표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제사제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그러면 구약의 제사제도가 가리킨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만일까요? 제사제도는 죄의 처리만이 목적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고 대신 죽으셨으니, 구약의 제사제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미리 보여 준 것밖에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역할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지성소로 들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히6:19-20).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존전으로 들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6장 20절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선구자가 되어 우리에게 본이 되도록 지성소로 들어 가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쳐질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 예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생 동안 하나님을 순종하면서 의롭게 살고 결국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도 예표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사제도 중 폐지된 것은 동물이 우리의 죄를 지고 죽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신약의 많은 구절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다음과 같이 구약제사제도의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5:2)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2:17).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13:1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라.” (벧전2:5)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제사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 보았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를 처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거룩한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첫번째 목적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희생제사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두번째 목적은 계속 진행중이기 때문에 신약시대라고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두번째 부분은 우리의 주일예배에서 매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구약제사제도와 예배의 관계를 다룰 때 더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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