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과 구원 8: 무형교회 혹은 유형교회?

본문: 고전12:12-13

2011년 1월 30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목사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는 물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거창하게 세례를 받아도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켰고 표와 실체를 일치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세례가 교회에 가입하는 의식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사람을 세례도 주지 않고 교회의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교회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달리 교회를 둘로 나눕니다. 그들은 교회를 유형교회 즉 보이는 교회와 무형교회 즉 보이지 않는 교회로 나눕니다. 그들에 따르면 유형교회는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한편 무형교회는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사람들 즉 이른바 ‘택자들’로 구성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교회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유형교회 안에는 불택자들도 있고 아주 드물지만 유형교회 밖에 있는 택자들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교회를 둘로 나눈 다음, 그들은 세례가 유형교회에 가입시키는 의식이지 무형교회에 가입시키는 의식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그 사람이 참된 신자들의 모임인 무형교회에 가입되었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믿고 세례를 받은 경우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그들처럼 믿지 않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차이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고 세례를 받아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에는 미묘한 논점이 얽혀 있습니다. 그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주장이 아니고 성경의 주장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때의 그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니고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후에 그가 교회를 영영 떠나는 경우에는 그가 최초에 세례를 받을 때 가졌던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고 봅니다. 그가 자기 딴에는 아무리 진실하게 신앙을 고백했더라도 또 진실로 자신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더라도 그의 믿음은 가짜였다고 봅니다. 그 자신도 속았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그의 믿음은 가짜였기 때문에,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 얻는다”는 진리가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렇게 그들은 믿음을 참 믿음과 거짓 믿음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교회를 무형교회와 유형교회, 말하자면 참 신자들의 모임과 거짓 신자들까지 섞인 모임으로 나눕니다. 그러면 그들의 주장을 성경도 지지할까요? 그들의 주장처럼 성경도 교회를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로 나눠서 세례를 유형교회와만 연결함으로써 세례를 구원과 분리할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성경이 교회라는 말을 어떤 개념으로 쓰는지 보겠습니다. 먼저 주요 주제가 교회론이라고 알려져 있는 에베소서를 보겠습니다. 에베소서는 시작만 보면 꼭 무형교회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1:4-5을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여기에서 ‘우리’는 창세 전에 구원을 얻기로 예정된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꼭 택자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에 말씀드린 대로 여기서 ‘선택’은 작정적 선택이 아니고 언약적 선택을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교회 안의 택자들만 가리키지 않고 에베소교회 성도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즉 무형교회 말고 유형교회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그 후의 내용들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2:11-15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 사도바울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원 후 1세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있었던 유형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택자들의 모임인 무형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사실은 사도바울이 4:1-16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이 유형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1-12절). 그러므로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교회는 유형교회이지 무형교회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을 보겠습니다. 12-13절에서 바울사도는 신자가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여기서 이 그리스도의 몸이 무형교회를 가리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7절에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신자들 전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Now you are the body of Christ and individually members of it).” “너희들 중 택자들만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하지 않고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택자들의 모임인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조직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가 4-11절과 28-31절에서 구체적인 은사들 즉 유형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아도 분명해집니다.

더욱이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6-17에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한 몸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한 빵에 참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한 떡에 참여함이라.” 여기에서 말하는 떡은 성찬식의 빵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빵 즉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들이 고린도전서 12:27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시면서 몸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하지만 그 몸은 성찬식의 빵을 통해서 이 땅에 임하시고 그 빵을 먹는 모든 사람은 그 몸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육체, 성찬의 빵, 교회가 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2

택자들만이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 즉 유형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에 유형교회와 구분되는 무형교회의 개념은 없습니다. 오직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 즉 유형교회의 개념만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교회는 유형교회입니다. 이런 사실은 신약성경 전체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저명한 교수였던 John Murray는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결코 무형의 조직체로 나타나 있지 않고 따라서 교회가 결코 무형적인 것으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습니다.3

그럼 성경에는 이렇게 무형교회에 대한 개념이 없는데 왜 사람들은 무형교회를 얘기할까요? 그 이유는 기독교 교리가 그리스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듯이 플라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이데아 세계에 있는 실체들의 그림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꽃들은 이데아에 존재하는 진짜 꽃들을 반영하는 그림자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이데아에 존재하는 진짜 사람의 그림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이데아에 있는 실체만이 완전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기독교에도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만물은 하늘에 있는 실체들의 그림자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도 천상에 있는 교회의 그림자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교회는 하늘에 있는, 택자들로 구성된 교회이고 이 땅에 있는 교회는 택자들과 불택자들로 구성된 불완전한 교회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이어 받아서 종교개혁가들은 전자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즉 무형교회, 후자를 눈에 보이는 교회 즉 유형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개념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구분해서 택자들로만 구성된 무형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배교할 불택자들도 섞여 있는 유형교회가 참된 교회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분은 교회에 결국에는 배교해서 떠날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데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사실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그리고 교회에 많은 문제점을 야기합니다. 이런 이분법은 사람들이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경시하게 만듭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다 참신자인 것도 아니고 교회를 안 다니더라도 참신자일 수 있으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소속되려는 노력을 안 하게 합니다. 많은 교회가 부패한 것도 이런 현상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예수님은 믿지만 교회는 안 믿는다,” “나는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크리스천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사람들과 힘들게 아웅다웅하면서 신앙생활하기 싫어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설교를 잘 한다고 소문난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들으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터넷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고 인터넷으로 헌금도 하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당분간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장기간 계속되면 그 사람은 신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다른 성도들과 같이 웃고 같이 우는 그런 인격적인 교제가 없이는 신앙이 유지가 안 됩니다. 우리가 죄 짓고 있는데도 그것을 책망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성도들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곧 병들고 맙니다. 우리가 힘들 때 격려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못 느낄 때 사랑을 부어 주는 성도들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시들시들해집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에는 신앙이 죽고 맙니다. 이것은 마치 물을 떠난 물고기와 같습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당분간은 살아 있지만 결국에는 죽는 것처럼 교회를 떠난 우리도 당분간은 신앙이 살아 있지만 결국에는 그 신앙이 죽고 맙니다.

무형교회 개념은 이기적인 개인주의도 부추깁니다. 교회를 안 다녀도 무형교회에 속한 참신자일 수 있는데 뭐하러 힘들게 교회를 다니겠습니까? 교회에 가면 참 신경써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누가 차가 없어서 교회 못 오면 차도 태워 줘야죠. 누가 아파서 교회 못 나오면 전화도 해 줘야죠. 누가 애를 낳으면 음식도 해 줘야죠. 자기 집안 일도 신경쓰기 골치 아픈데 신경써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집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왜 이렇게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이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겸손하라고 하셨다는데 자기 믿음을 자랑하는 사람도 많고 자기 남편 자랑하고 자기 자식 자랑하는 사람도 많고 자기 재산 자랑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랑의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하면서 꼬치꼬치 뒤를 캐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교묘하게 속을 박박 긁는 사람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요? 세상에서라면 이해하겠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니까 교회에 다닐 맛이 안 생깁니다. 그래서 속 편하게 교회 안 다니고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 드리기로 합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그러면서도 세상에 유명하다는 목사님 설교 골라가면서 들을 수 있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천국 가는 기차를 무임승차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전투 없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지 않고는 들어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속까지 순결한 사람들만이 다니는 그런 이상적인 단체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죄악으로 물든 사람,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육체적 정신적으로 연약한 사람 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결점 투성이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 추한 모임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성육신에 이은 또 하나의 낮아지심입니다. 창조주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한낱 피조물인 인간이 되심으로써 낮아지셨고,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온갖 문제 투성이의 사람들을 형제자매라 부르심으로써 또 한 번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불완전한 몸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끊임없이 새롭게 하심으로써 결국에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만드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 개인과 교회는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는 문제 투성이였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생각과 거룩하지 못한 습관과 거룩하지 못한 행위에 절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안 좋은 것들 중 일부는 떼어 내서 버리십니다. 그리고 일부는 거룩하게 변화시켜서 사용하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교회에는 문제 투성이의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들 중 자신의 죄를 고집하면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농부가 포도나무 가지를 쳐내듯이 쳐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악함을 알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은 더욱 거룩하게 변화시키십니다. 신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거룩해지듯이 교회도 시간이 지날수록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성화를 거쳐 결국 임종시에 영화에 이르듯이 교회도 성화를 거쳐 결국 주님 재림시에 영화에 이르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기본 원리는 똑같은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택자들로만 구성된 완전한 무형교회란 없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불완전한 교회와 미래에 완성될 종말적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사건도 현재로 보실 수 있으니까 그 분의 마음 속에는 이미 택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우리가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으니까 우리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 교회는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작정적 구원이란 없고 오직 언약적 구원의 현재와 미래만 있을 뿐인 것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유형교회에 가입된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 유형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고 무형교회만이 참 교회라는 말은 틀립니다. 성경에 무형교회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교회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미있는 교회는 오직 유형교회뿐입니다. 이 교회가 참 교회이고 이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지극히 불완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임을 자신의 몸과 동일시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 갑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거룩해져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원한 교제에 들어갑니다.

1 로마서 6:3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all of us who have been baptized into Christ Jesus …”

2 그리스도의 이 세 몸은 성찬식 때 일어나는 삼위일체적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즉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교회로서의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를 먹으면서(성찬의 빵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다(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

3 Douglas Wilson, “The Church: Visible or Invisible,” in The Federal Vision (Athanasius Press, 2004),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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