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과 구원 7: 세례의 효력

본문: 롬6:1-7

2011년 1월 16일

Christ Covenant Church 오후예배

 한재일 목사

 

지난 설교 몇 회에 걸쳐서 제가 작정적 구원과 언약적 구원을 언급했습니다. 작정적 구원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우리의 궁극적 구원이요 언약적 구원은 현재 우리가 누리는 구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이 언약적 구원이 결국은 작정적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는 작정적 구원이란 없습니다. 단지 언약적 구원의 현재와 미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작정적 구원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고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신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우리가 언제 구원을 받았을까요? 물론 언약적 의미에서 말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것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표현합니다(3-4절). 즉 중생 사건과 세례를 받은 사건을 하나로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례를 받았을 때 중생했다는 말일까요? 이에 대하여 현대의 복음주의자들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중생을 묘사하는 이 구절이 가리키는 세례는 물세례가 아니고 소위 ‘성령세례’라고 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거듭나는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데 이 구절이 그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즉 중생하는 순간과 우리가 물세례를 받는 순간은 거의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데 어떻게 중생을 묘사하는 이 본문이 물세례를 가리킬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물세례와 중생은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즉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다르다고 봅니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다르다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듭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막1:8). 이 구절을 보면 세례요한이 베푸는 물세례와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가 구별되어 나옵니다. 요한이 베푸는 물세례는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베푸실 세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우리가 받는 물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이런 사고의 연장선에서 이들은 ‘성령세례’를 언급하는 다른 구절인 고린도전서 12:13의 구절, 즉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 즉 택자로 구성된 보이지 않는 우주적 교회에 가입시키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에 따르면 우리가 받는 물세례는 진정한 의미의 세례 즉 ‘성령세례’를 가리키는 상징일 뿐입니다. 진짜 중생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즉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을 때 일어나고 물세례는 단지 그것을 가리키는 표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이처럼 표와 이 표가 가리키는 실체를 분리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형식과 내용 또는 표와 실체를 분리하는 이런 이분법이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 때 노아의 가족들이 물을 뚫고 구원받은 사건과 물세례를 비교하면서 이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합니다(벧전3:20-21).1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성령세례이고 물세례는 단지 그것을 상징할 뿐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성령세례’라는 말이 없습니다. 단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받는다)”는 표현만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받는다)”는 말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사건을 가리킬까요? 앞에서 언급한 마가복음 1:8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베푸실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일어나는 중생 사건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세례 즉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을 가리킵니다.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자신이 계시는 모임 즉 교회를 만드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똑같은 표현이 나타나는 사도행전 1:4-5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세례’는 분명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 세례가 몇 날이 못되어 예루살렘에서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13에 나오는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는 구절도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일어나는 중생사건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 우주적인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는 말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물세례를 통해서 고린도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뜻이지 물세례를 받기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우주적 보편교회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은 물세례 때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령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에 따르면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시작된 사건 이후에는 물세례와 관계없는 별도의 성령세례는 없습니다.2 우리가 받는 물세례가 성령세례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전서 3:20-21은 이 물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세례는 이미 일어난 구원을 상징하는 의식일 뿐이라거나 이미 일어난 구원을 교회에 공표하는 의식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성경은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표와 실체를 분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과 내용을 하나로 또 표와 실체를 하나로 묶어 놓으셨습니다. 분명히 중생과 세례는 구분됩니다. 그러나 그 둘은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례 없이 중생 없고 중생 없이 세례 없습니다. 간혹 예외가 있을 수는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안 된다’는 이런 원리는 많은 기독교 교리의 바탕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도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노력도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습니다.

자, 제가 이렇게 세례와 중생을 하나로 봐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나니까 여러분 안에 여러가지 질문들이 떠오를 겁니다. 먼저 “중생과 세례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면 믿음이 있는 사람이더라도 세례 받기 전에는 구원받지 못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세례받기 전에 갑자기 죽었을 때 이 사람이 세례를 못 받았으니까 정말 구원을 못 받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이 구원을 못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받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시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으니 예수님을 믿은 그 사람은 당연히 중생을 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들의 약혼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에 따르면 약혼한 사람들은 부부로 간주됩니다. 이것은 신명기 22:23-24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 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그리고 이런 관습은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1:18-19). 유대 사회에서 약혼한 사람들은 남편과 아내로 불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진짜 부부였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진짜 부부처럼 같이 살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좀 전에 말씀드린 성경구절들에서같이 진짜 부부처럼 순결을 유지해야 했지만 진짜 부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진짜 부부가 되려면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결혼을 해야 비로소 부부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약혼은 했지만 결혼은 아직 안 한 사람들은 부부이면서도 부부가 아니었습니다. 약혼으로 생겨나는 부부관계는 미완성의 부부관계였습니다.

이런 원리는 구원과 세례에도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그 사람이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미완성의 구원입니다. 구원 받았지만 아직 구원 받은 게 아닌 것입니다. 약혼했지만 결혼은 아직 안 한 사람들이 아직 부부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없어서 같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었지만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신자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없어서 성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약혼한 사람들이 끝내 결혼을 하지 않으면 부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믿은 사람이 끝내 세례를 받지 않으면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3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을 겨를도 없이 죽은 사람이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죽은 사람이야 예외지만, 일부러 세례를 받지 않다가 죽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봐야 합니다.

세례의 효력을 강조하는 저의 주장 즉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주장에 혹자는 또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4 “그러면 믿음이 없이 세례를 받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입니다. 물론 세례의 효력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례와 중생을 짝지어 놓으신 하나님의 선언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놓으신 것을 우리가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합당한 절차를 따라서 세례를 받으면 그 세례의 효력은 영원합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세례를 두 번 주지 않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세례는 무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이 믿음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세례의 효력은 항상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효력이 나타나는 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례도 효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세례 안에 효력이 잠재해 있지만 그게 실제로 나타나지를 못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목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는 설교가 그 자체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효력을 가지고 있지만 청중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효력이 있지만 사람들이 그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는 설교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또 예수님의 죽음이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경우 다 믿음이 있어야 효력이 나타나지만 그 자체에 효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로 만드신 것을 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례에서 표와 이 표가 가리키는 실체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성찬에서 빵을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26:26-28). 예수님은 빵이 자신의 몸을 상징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포도주가 자신의 피를 상징한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빵이 자신의 몸이고 포도주가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는 우리의 영적 더러움을 씻어내는 성령님의 행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행위 그 자체입니다. 물론 성찬과 세례 둘 다 믿음이 없으면 그 효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 성찬에 참여하면 예수님의 몸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게 아닙니다. 믿음 없이 세례를 받으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으면 그 때 쓰이는 물이 우리의 영적 더러움을 씻어내고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 세례를 받으면 그 사람이 그 세례로 구원받는 것으로 알고 감격해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는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감격하고 그가 세례를 받을 때는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니까 그냥 기념행사 정도로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에서 사람들이 약혼식 때도 기뻐하지만, 진짜 결혼은 결혼식 때 이루어지니까 결혼식 때 더 기뻐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작정적인 의미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약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짜 거듭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입니다. 작정적 구원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언약적 구원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손길에 따라 일어나는 중생의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할 수 없다는 면에서 우리는 그 중생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중생은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나는 중생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순간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순간이라기보다는 세례를 받는 순간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세례받는 순간이 진정으로 중생하는 순간입니다. 세례 받을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교회 앞에서 고백하고 교회는 우리를 자신에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에 이 세례의 순간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자신에게 받아 들이는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의 순간이 중생하는 순간인 셈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짝지어 놓으신 표와 실체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봄으로써, 여러분이 성례에 참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1 개역개정판에서는 21절을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라고 번역하여서 원문의 뜻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반면 ESV는 원문의 뜻을 다음과 같이 잘 밝히고 있다: “Baptism, which corresponds to this, now saves you…”

2 물론 사도행전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시는 사건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건들도 넓은 의미로는 오순절 사건에 포함시킬 수 있다.

3 그러면 침례교처럼 신자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지 않고 있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 이들은 구원을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부모의 신앙을 따라서 믿음이 있더라도 세례를 받지 않고 있으니까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내 생각에는 비록 이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도 구원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같다. 왜냐하면 이들이 세례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교회와 부모들이 세례주기를 거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세례를 받지 않은 책임이 아직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의사결정 가능자인 교회와 부모에게 돌아간다.

4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성경의 주장이다(벧전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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