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마 5:3

2015년 4월 26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목사

 

팔복 즉 천국 백성이 지녀야 할 특성들 중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말씀하신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듯이 팔복은 각 복이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논리적으로 뒷 복은 앞 복을 따라 나오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복은 나머지 일곱 복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1복은 나머지 일곱 복의 기초가 됩니다. 1복은 천국 백성의 특성들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뒤에서도 살펴 보겠지만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천국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1복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뒤의 일곱 복의 특성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은 크리스천이 지녀야 할 덕목 중 기본 중의 기본인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 뜻을 밝히 알기 위해서 먼저 심령의 가난이 의미하지 않는 것을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심령의 가난은 물질적 가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많은 재물을 잃기 싫어서 예수님을 따르기를 주저하는 청년에게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 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24). 이처럼 돈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모든 것 앞에 하나님을 둔다는 것인데, 돈이 많으면 그 많은 것들을 다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돈이 얼마나 많은 기쁨과 안락을 주는데 그것을 포기하겠습니까? 돈이 많으면 얼마나 위세를 부릴 수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겠습니까? 돈이 많으면 얼마나 안심이 되는데 그것을 포기하겠습니까? 이렇게 부자는 천국에서 멉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더 가까울까요?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부자보다 더 돈을 밝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자들을 부러워해서 늘 돈 벌 생각만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돈에 매여 살기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매한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가난 자체가 천국행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심령의 가난은 물질적 가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심령의 가난은 자연인 즉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이 아닙니다. 곧 살펴 보겠지만 심령의 가난은 겸손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크리스천이 아닌데도 참으로 겸손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랑도 하지 않으며 항상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않으며 늘상 다른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며 “아니,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과분한 칭찬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참으로 겸손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천국에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성경이 말하는 크리스천의 겸손은 세상이 말하는 겸손과 다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앞에서 살펴 본대로 심령의 가난은 물질적 가난과 다르지만 그 둘은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난하다’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πτωχός(프토코스)가 뜻하는 가난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가난과 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가난이라고 하면 물질적으로 빈궁한 상태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를 표현하는 헬라어는 πένης(페네스)라고 따로 있습니다. 이 단어는 자산이 없어서 생계를 위해 매일 열심히 일해야 하는 상태 즉 가난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본문의 프토코스는 거지 상태 즉 생계수단이 아무 것도 없어서 다른 사람한테 구걸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잘 알려면 그 단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עָנִי(아니)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 단어는 ‘가난하다, 고통 당하다, 겸손하다’라는 뜻을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적 의미에서 가난은 아무 것도 없어서 고통 당하는 비참한 상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겸손한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심령이 가난한’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뜻하신 것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영적으로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살기 위해서는 구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영적 자산이 하나도 없어서 영이 살기 위해서는 구걸할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구걸하는 거지가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적 거지라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거지가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적 거지라서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섰을 때 우리가 처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사람 앞에 서면 자신이 참으로 작아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의 위대한 업적 앞에 우리가 한 일은 초라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의 심오한 사상을 들으니 우리가 과연 생각이나 하고 사는 사람인지 회의가 듭니다. 그의 고매한 인격을 접하니 우리는 아예 인격이란 게 없는 듯 보입니다. 위대한 사람 앞에만 서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만물을 창조하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가 느낄 감정은 어떻겠습니까? 무한하신 절대자 앞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결핍감을 느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죄와 허물이 가득한 사람들이니 그 영광스러움에 절대적인 비참함을 느낄 것입니다.

율법에 통달했던 유명한 율법학자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을 자랑하기로 치면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바울 사도가 예수님의 영광을 접했을 때 느낀 감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빌3:7-8). 숙련된 어부인 베드로 사도가 자신이 밤새 애썼어도 물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장소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게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 신성에 압도되었을 때 느꼈던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5:8).

이사야 선지자가 보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느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천사들마저도 그 앞에서는 자기의 얼굴과 발을 가릴 수밖에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느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탄식했습니다(사6:5). 요한 사도가 부활승천하신 후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을 뵈었을 때 그 영광에 압도되었을 때 느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계1:12-17).

이것이 바로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맞닥뜨렸을 때 보이게 되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될 때마다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성숙도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의 추악함이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위대한 사랑 앞에 서면 사람들을 저주하고 미워하는 나의 본성이 낱낱이 드러나고, 그 분의 완전한 의로움 앞에 서면 내가 몰래 저질렀던 불의한 행위들이 속속 드러나고, 그 분의 순결함 앞에 서면 저 밑바닥에 감춰져 있던 나의 더러운 욕망들이 숨김없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영적 파산자요 영적 거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 앞에 납작 엎어져서 그 분의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된데 그 이유가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하신 일이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시험을 받으신 후 처음 하신 일이 자신의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말씀을 읽으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눅4:16-21). 그러니까 이 성경봉독은 천국 선포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읽으신 성경 내용 중에는 ‘복음을 전한다’는 표현도 나오고 병을 고친다는 내용도 나오므로, 그 기본 내용이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면서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하는 마태복음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마4:23). 따라서 예수님께서 읽으신 내용 중에 나오는 ‘주의 은혜의 해’는 천국이 도래하는 때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읽으신 구절은 이사야 61장 1-2절인데 3절까지 포함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되리라.”

여기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를 보내실 것인데, 그 메시야가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때,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보복하시는 때를 선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나라를 잃고 아직도 이방의 압제 아래 놓여 있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두 이 영광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나서 원수들을 무찌르고 자신들의 비참을 영광으로 바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영광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 곧 천국이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그 ‘의의 나무’가 될 수 있을까요? 누가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거기에 들어갈 1순위는 당연히 자기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처럼 율법을 잘 지킨 사람들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사야는 그 때 메시아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대상은 가난한 자라고 말하고 메시아가 고치는 대상은 마음이 상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57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또 66장 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리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시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분께서 생각하신 천국의 백성이 될 사람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킨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여 겸손하게 통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전혀 심령이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에는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사람이 둘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일부러 세리랑 떨어져서 기도하기를 자신은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옆에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일 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탄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둘 중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의로운’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 세리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의인’ 바리새인입니까 아니면 ‘죄인’ 세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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