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살아있는 이들

#참고로 이 글은 코리안뉴스 412()에 실린 글입니다.

예기치 못한 비보는 늘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했다는 전갈이 그렇다. 지인들이나 친근한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지난달에도 장례식에 참석하여 고인에 대하여 눈물로 애틋하게 추념하는 이들을 지켜보았다. 모두가 아파하며 슬퍼했지만, 아픔 슬픔이 다는 아니었다. 깨달음을 깊게 갖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심을 깊게 다독이기 때문이다. 이별, 죽음 그 자체가 우리에게 최종선고가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서다. 적어도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렇다. 두 달 전 장애인의 별이던 강 영우 박사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등졌을 때 그를 아끼던 신앙인들을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아버지 이어령 박사를 신앙으로 이끈 딸 이민아 목사가 지난 달 위암으로 세상을 등졌을 때도 그녀를 아끼던 신앙인들은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저 두 사람의 병환에 남다른 마음을 가졌을 법 한 한 명사의 시가 떠오른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위 시는 지금도 암과 동행하고 있는 시인 이해인의 고백시의 한 일부다. 그녀는 지난 달 자신을 인터뷰 한 시인에게 “가장 힘든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쓴 시다. 시의 내용처럼 일단 투병의 방향을 정해두고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굳히니 마음에 평화가 오고 결심도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더라”고 말했다. 살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 하루는 살아야 할 몫이 있는 하루다. 언제 부름받을지 모르지만 다시 살아날 소망으로 인하여 그 하루 하루를 견딜 수도 있다는 고백이다.

지난 달 성황리에 마친 드라마 [해품달]에서 죽은(것으로 알려진) 연우가 되돌아온 일은 짜릿한 흥분을 안겼다. 그리고 훤과 연우는 그렇게 그리던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독술에 의하여 기절한 연우가 혹독한 고생을 치르고 다시 되돌아오는 장면에서 픽션 [나르니아 연대기]의 한 대목이 오우버랩된다. 나르니아에서, 희망의 상징인 사자는 악녀의 마술에 걸려 꼼짝 못하다가 다시 살아나 주인공들을 구출하며 악한 세력을 퇴치한다. 춥고 불안한 곳을 따듯하고 해맑은 곳으로 바꾼다. 그 사자가 되살아나는 장면을 보면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 예수님이 오우버랩된다.

앞서 소개한 저명한 두 신앙인들은 죽었지만 죽음 자체가 끝은 아니다. 언젠가 그 가족과 재회할 것이기에 그렇다. 분명 아직 알려지지 않은 행복한 결말이 뒤따를 것이다. 새롭게 재회할 기쁨이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신앙인들에게 이 일은 예고된, 알 수 있는 스포일러(주요 내용이나 줄거리를 미리 알려주는 정보)인 셈이다. 해품달에서 연우가 경험한 재결합의 기쁨처럼 말이다. 나르니아에서 사자가 기지개를 피며 깨어나는 감격처럼 말이다. 이십일 세기 전에 인간의 몸으로 입고 오신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것처럼 말이다. “죽어도, 죽었어도 다시 살아나는” 모델을 영원히 보이셨던 주님은 그래서 죽음을 이기셨다. 죽음이 최종적이지 않게 하셨다. 그래서 고통스러우셨지만 담대하셨고 처절하셨지만 의연하셨다. 그래서였을까? 이들 두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고 투철했다고 알려졌다.

이 목사의 비보를 전한 한 기자는 [땅에서 하늘처럼]을 죽음을 예감한 듯한 제목이라며 고인의 신앙고백을 인용했다. “내 몸이 죽는다 해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리고 강 박사의 부의를 알린 한 기자의 첫 묘사는 이러했다. “‘눈 먼 새의 노래’는 마지막도 아름다웠다.” 뭐니뭐니해도 부활의 신앙을 가진 신앙인들의 죽음과 삶은 예수님의 죽음과 삶처럼 결연하고 아름다운 듯 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석 창훈

(수필가 및 번역가, 컬럼니스트, 현 바로그교회 담임목사, 전 두레연구원 및 주간크리스쳔뉴스위크편집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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