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의 구원과 예수님의 구원

본문: 마1:18-25

2014년 10월 5일

Christ Covenant Church 주일학교 예배

한재일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리고 이어서 22-2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즉 자기 백성들을 구원할 예수라 불릴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이것은 선지자가 처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이라 불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 말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구원과 이 예언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내용을 알려면 이 예언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 예언은 이사야 7:14을 인용한 것인데 그 배경은 유다왕 아하스 때입니다. 당시에 아하스와 그 백성들은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의 침공 위협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두 왕과 왕국을 멸망시켜서 유다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표증으로 주신 것이 이 예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이 이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도 아하스 왕 때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즉 유대인들을 외국의 침략에서 구원하실까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베푸실 구원일까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외국의 위협에서가 아닌 자신의 백성들의 죄에서 건지실 것이고 그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왜 예언의 내용과 성취의 내용이 다를까요?

이런 당혹감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의 기원을 살필 때도 느끼께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 ‘예수’는 헬라어인데 원래의 히브리 이름은 예수아(예슈아) 또는 여호수아(여호슈아)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이름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이름을 가졌던 옛날의 구원자가 한 일을 성취하실 분이시기도 하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베푼 구원을 성취하실 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가 베푼 구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여호수아는 잘 아시듯이 주로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행진하던 이스라엘을 공격한 아말렉을 쳐부술 때 군 사령관이었고 그 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도 군사령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푼 구원은 군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같은 이름을 가졌던 여호수아처럼 이스라엘에 구원을 베풀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푸실 구원은 군사적인 것이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여호수아를 따서 이름을 지었을까요? 도대체 여호수아의 구원이 예수님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려면 성경에 나타난 구원개념의 발전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에 초기에 계시된 구원 개념은 외국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신 구원은 이집트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사시대 때도 구원은 미디안, 모압, 암몬, 블레셋 등의 외국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왕국시대 때도 구원은 아람, 모압, 앗수르 등의 외국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압제로부터의 구원이 죄에서의 구원과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런 압제에서의 구원은 우리의 죄에서의 구원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이 외국의 지배를 받은 것은 그들이 외국의 신들을 흠모하여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에스겔 선지자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오홀라(사마리아)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 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 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겔23:5-9). 즉 하나님께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 당해 고통을 받게 하신 것은 그들이 앗수르의 문화를 흠모하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자신이 섬기는 우상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저지를 때 우리는 그 우상의 노예가 되어서 고통스런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우상 앗수르의 노예가 되어서 고난을 당한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우상숭배의 대상이 변해 가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죄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알려 줍니다. 구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시대와 왕국시대에는 명백히 우상숭배를 합니다. 바알, 몰렉, 그모스, 아스다롯 등 이방나라들의 신들을 섬깁니다. 그러나 이런 우상숭배의 결과로 바벨론에 끌려 갔다 온 후에는 더 이상 그런 우상들을 섬기지 않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책들인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에는 그런 우상숭배를 책망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더 이상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게 되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우상숭배는 그대로인 채 다만 그 방법이 좀 더 교묘해졌을 뿐입니다. 옛날에는 누가 봐도 명백히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즉 이방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우상숭배가 아닌 듯하지만 실제로는 더 교묘하고 기만적인 우상숭배를 저질렀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과 성전을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성전의식을 행하는 한 언제든지 구원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참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들의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 밝히 드러내 보여 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자신들 안에 깊이 숨겨져 있던 교만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사도의 증언을 들어 보십시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롬2:17-20).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방의 빛이요 이방인의 선생이라고 자랑하면서 자신들을 한껏 높이고 이방인들은 멸시하였습니다. 그들의 우상숭배의 본질은 교만이요 자기영광이었던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이런 본질은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몇 년을 정성 들여 가르쳐 놓았더니 그들이 한다는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 (막10:35-37). 이것이 죄의 핵심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높이고 자기가 영광 받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섬기는 것, 이것이 궁극적인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기를 섬길 때 우리는 자기사랑의 노예가 되어 시기, 질투, 미움, 낙심, 분노 등 온갖 죄 가운데 빠져서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런 우상숭배에서, 이런 죄의 노예상태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영광을 구했던 그 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2-45).

우상숭배의 이런 점진적인 계시는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성경에서처럼 우리도 우상이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외면적인 것에서 내면적인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옮겨 갑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우상이 돈, 섹스, 권력, 다른 사람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기영광으로 옯겨 갑니다. 아니,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아서 깨닫지 못했을 뿐, 처음부터 우리의 우상은 자기영광과 자기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한 것도 자기를 사랑해서였고, 우리가 권력을 추구한 것도 자기를 사랑해서였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것도 자기를 사랑해서였습니다. 상대방이 나의 영광을 추구하고 나의 사랑을 만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죄의 본질은 자기사랑입니다. 피상적인 우상을 제거해 놓고 우상숭배의 죄를 짓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에게 심판을 받았던 유대인들도 그런 우상쯤은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우상인 자기사랑과 자기영광은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여러분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돈도 사랑하지 않고 권력도 추구하지 않고 교회직분도 욕심 내지 않고 있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마음 깊숙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계십니까? 그러면 여러분도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2 thoughts on “여호수아의 구원과 예수님의 구원”

  1. 3번째 단락의 6,7번째 줄에
    여호수(아)를 추가해야 하네요.^^

    죄(우상숭배)가 죄의 모습으로 오지 않고
    더욱 교묘하고 은밀하게 온다는 사실에
    새삼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자기 사랑이라는 우상 앞에 나는 자유로운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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