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기독교

본문: 벧전3:15

2010년 8월 29일

오후예배

 

한국에서 기독교는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당시에 기독교인구의 비율은 아주 미미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절반 가량이 기독교인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대중들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일도 주로 기독교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네티즌들이 기독교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개독교’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라는 명칭이 원래는 개신교, 카톨릭, 정교 등,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상하게 개신교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티즌들의 욕은 개신교를 향한 것입니다. 아무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제는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이 고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2008년에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협회)에서 각 종교의 신뢰도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가장 신뢰하는 종교기관은?”이라는 질문에 카톨릭이라고 답한 사람은 35.2%, 불교라고 답한 사람은 31.1%, 개신교라고 답한 사람은 18.0%였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기독교인들(개신교인들)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간다”는 진술에 동의한 응답자의 비중은 14%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동의하지 않는다”(전혀 또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고 응답한 사람은 그 3.5배인 50.8%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호감을 가지고 있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31.5%가 불교를, 29.8%는 카톨릭을, 20.6%만이 개신교를 택했습니다. 개신교인의 비율이 20%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개신교인 외에는 개신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이 거의 없는 셈입니다. 수치를 보면 오히려 일부 개신교인조차도 자신의 종교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한국과 유사한 상황을 보이고 있는 미국의 Barna그룹이라는 리서치기관이 한 조사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나그룹은 2007년에 미국의 젊은 세대가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해서 그 결과를 “Unchristian”이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그 책은 미국의 젊은이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위선적인: 외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우월한 척 행동한다고 본다. 외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럴듯하게 꾸며진 이미지를 보여주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2. 전도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외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진심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한다. 외부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목표물처럼 취급받는다고 느낀다. 외부인들 중 많은 이들이 이미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시도’해 보았고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다가와 “구원 받으라”고 말할 때마다 그들의 동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3.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외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편협하여 동성애자들을 혐오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동성애자들을 비난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며, 동성애를 금지하기 위해 정치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본다.

4. 안일한(sheltered): 외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시대적이고, 지루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잡한 현실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복합적인 대응을 할 줄 모르며, 단순한 해결책과 정답을 선호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가 그리스도인들은 복잡다단하고 자질구레한 인간사에 적절히 대처하려 하지 않는다.

5. 지나치게 정치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중에는 정치적 이슈에 지나치게 열중해 있으며, 보수적인 관점에서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거나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내용도 있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정치적 우파로 간주되기도 한다.

6. 타인을 판단하는: 외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쉽게 판단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인들을 향한 태도나 관점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외부인들의 생각이다. 외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말로만 그러는 것인지 의아해한다.

이런 반응들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은 기독교인은 무례하고 독선적이며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편협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억울한 면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 주위에 있는 기독교인들과 또 우리의 과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의 이런 반응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나 기독교 신앙을 강하게 붙들고 있는 보수적 기독교인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강한 듯 보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예의바른 사람은 종종 강한 신념이 없고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예의가 없는 셈입니다. 또 한국 교계에서 회자되는 말처럼 자유자의자는 인격은 좋지만 신앙이 안 좋고 보수주의자는 신앙은 좋지만 인격이 안 좋은 셈입니다. 사실 한국 네티즌들의 개신교 비판도 대체로 보수적 개신교인들을 향해 있습니다.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이런 평가에 반발합니다. 자신들이 외부인들에게 독선적으로 비치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진리가 아닌 것과 타협할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어떻게 빛과 어둠이 함께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따라서 비기독교인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들이 자주 떠올리는 이미지는 전쟁 즉 영적 전쟁입니다. 지금처럼 다원주의가 횡행하고 지금처럼 진리가 교묘하게 위협받고 있는 시대에 어떻게 대화와 관용을 논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어떻게 동성애자와 대화하고 어떻게 낙태찬성자와 대화하며 또 어떻게 불교와 대화할 수 있느냐는 거죠. 어떻게 그런 사탄적인 세력과 대화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기독교 세력에 적대적이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로 인해 받는 ‘독선적이고 무례하다’는 평가에 개의치 않습니다. 의를 위해서 살면 핍박받을 수도 있다고 말이죠.

그러나 성경은 비기독교인들에게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의 본문 베드로전서 3:15을 보겠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불신자에게 복음을 얘기할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두려움”은 “존중”이 더 적합한 번역입니다. 그래서 NIV와 ESV 등은 “respect”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불신자를 대할 때, 그들의 생각은 그들의 아비인 마귀에게서 나오는 반진리라고 생각해서 독선적인 태도로 그들을 대하지 말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대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이 초대교회 시절과 같은 줄 아십니까? 지금과 같이 진리가 혼미해지고 온갖 종교와 반기독교적인 문화가 판치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존중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시절은 성령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기독교 진리가 강력하게 세워지고 다른 것들은 기독교의 위세 앞에서 맥을 못 추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를 위협하는 이단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감싸고 있었던 문화는 온통 이교적이고 타락한 문화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런 적대적인 문화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불신자를 대할 때 ‘온유와 존중’으로 대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적대적 세상에서도 ‘온유와 존중’으로 불신자들을 대했으면 사정이 훨씬 나아진 지금은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런 존중하는 태도를 배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대략 다음의 세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다른 종교에서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셋째, 진리를 가진 자로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은총(특별은혜)뿐만 아니라 일반은총(일반은혜)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에게 특별은총을 주셔서 죄로 죽었던 데서 살아나 새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들 안에 성령님께서 계셔서 삶을 인도하니 그들은 불신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며 그들은 결국 천국(heaven)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리가 어떤 기독교인들에게는 비기독교인들의 삶을 폄하하는 역할을 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해서 사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온갖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에 있으니 그들의 행위와 삶은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악한 행위 때문에 결국은 지옥에 갈 사람들의 삶에 무슨 가치를 부여할 게 있냐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기독교인들의 사상과 문화는 다 없어져야 하는 대상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놔두시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참으시기 때문이지 그 안에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러니 이런 사람들이 비기독교 문화에 대해 적대적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일반은총의 존재를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태초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타락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그 타락이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뒤틀리고 약해졌지만 여전히 인간에게는 참이 남아 있고 선이 남아 있고 아름다움이 남아 있습니다. 비기독교인에게도 진선미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비기독교인도 무엇이 옳은지 압니다. 그들도 무엇이 선한지 압니다. 그들도 무엇이 아름다운지 압니다. 그들이 수많은 잠언과 격언들을 통해서 남겨 놓은 도덕적 교훈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재난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베풀고 있는 숭고한 사랑과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바치는 헌신적인 사랑을 보십시오. 그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와 그들이 써내는 가슴을 울리는 시와 그들이 세운 위대한 건축물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 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도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겠습니까? 그들을 단지 전도대상으로만 삼고 그들의 회심을 위해서 애쓰다가 그들이 결국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면 그들과 관계를 단절해야 합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의 교제는 시간낭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결국은 신자가 되지 않더라도, 그들이 결국에는 지옥에 가더라도, 우리가 그들과 나누는 삶은 하나님께 가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사는 삶은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고귀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이 누리는 삶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들이 결국에는 지옥에 가더라도 그들이 살았던 삶, 그들이 만들었던 문화, 그들이 만들었던 예술이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흘러나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꼭 기독교인이 만든 것만 가치 있고 꼭 기독교적 소재가 들어간 것만이 가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인인 윤동주의 시 ‘서시’만 가치 있고 스님인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은 가치 없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복음성가는 들어도 되지만 가요는 들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을 버리고 정태춘의 노래 ‘시인의 마을’을 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부분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알도록 우리에게 베푸신 일반은총을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런 비기독교적인 작품이 성경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바르게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인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다른 종교에서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다른 종교는 사탄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사탄이 하나님께 대적하기 위해서 만든 도구들이고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따라서 보수적인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가 다른 종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가 그의 명저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한 말입니다.

“후자의 맥락에서 개혁주의는 자연종교에 대해서만 언급했고, 이 자연종교와 이방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이방종교는 미혹 또는 악령의 영향으로 생겨났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과 일반은총은 과학, 예술, 도덕, 법 등에만 역사한 것이 아니고 이방종교에도 역사하였다. 칼빈은 “종교의 씨앗,” 신성의 지각”이라는 표현으로 이런 점을 잘 지적하였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결국 사기꾼들이나 사탄의 도구가 아니고 자신들의 종교성을 통하여 자신들의 시대와 사람들을 위해 사명을 완수해야 했던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종종 사람들의 삶에 유익을 끼쳤던 사람들이었다. 갖가지 종교들은 오류는 있었을지언정 사람들의 종교적 필요를 어느 정도는 충족시켰고 삶의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이방세계에 단지 절망의 절규만 있지 않고 자신, 희망, 수용, 평화, 순종, 인내 등도 있음을 본다. 이방종교에는 비록 타락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참 종교에 필수적인 요소와 형식들, 예컨대 신에 대한 개념, 죄의식, 구원에 대한 갈망, 희생제사, 제사장제도, 신전, 의식, 기도 등이 있다. 이방종교에는 더 낫고 더 순전한 종교에 대한 무의식적 예언과 그런 종교에 대한 놀라운 기대가 곳곳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방종교와 대립적이기도 하지만 이방종교의 성취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참종교로서 가장 높고 가장 순전한 종교이고 모든 종교의 참이다. 거기에 캐리커처로 있는 것이 여기에는 살아 있는 원형으로 있다. 거기에 모양으로만 있는 것이 여기에는 본질로 있다. 거기에서 찾는 것들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는 민족중심주의(ethnicism)의 설명(explanation)이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 그리고 모든 이방인들의 갈망에 약속으로 주어진 분이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인류의 유익을 위해 선택되었다. 아브라함의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바빙크는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가 전적으로 사탄의 도구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록 왜곡되어 있지만 그 안에 참종교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어서 기독교의 도래를 예비한 것으로 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더 낫고 더 참된 종교를 꿈꾸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를 다른 종교의 성취라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다른 종교에는 왜곡된 신관과 왜곡된 인간관 등이 들어 있어서 그들이 기독교와 대립적이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실 일을 돕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다른 종교를 적대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다른 종교에도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불교는 평화적이고 관용적입니다. 유교는 충, 효, 인, 의, 신 등의 뛰어난 윤리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연을 자신의 형제자매로 생각해서 아끼고 잘 보존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장점들을 그 종교들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눈을 희둥그레 뜰지도 모릅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서 배운다고? 그럼 기독교가 불완전하단 말이야?”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럼 기독교가 완전할까요? 아닙니다.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오류가 많습니다. 완전하고 무오한 것은 성경이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무오한 존재는 하나님이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우리는 그로부터 불완전한 기독교를 만들어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저질렀던 잘못을 보십시오. 십자군전쟁을 보고 노예제도를 보십시오. 또 지난 세기에 세르비아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던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현재의 기독교는 불완전합니다. 현재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그런 장점들은 이미 성경에 계시되어 있어서 우리가 성경을 잘 해석하면 찾아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성과 우리의 유한성으로 인해 찾아낼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다른 종교를 보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이 실마리가 되어 성경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놓쳤던 많은 진리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다른 종교인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접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진리를 가졌으니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전도를 할 때 기독교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른바 모던시대였죠. 그러나 지금은 포스트모던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누구에게나 옳고 어디에서나 옳은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더 이상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주장이 쉽게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는 진리보다는 선을 중시합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합니다. 논리보다는 관계를 중시합니다. 거창한 진리보다는 나에게 의미가 있는 무엇인가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지금의 싸움은 무엇이 옳으냐의 싸움이 아니라 무엇이 선하냐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왜 옳은지 변증학을 써가면서 또 교리를 늘어 놓으면서 설득하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기독교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를 소개하려면, 우리가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 진리에서 선한 행실이 나와야 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우리가 하는 ‘행동’을 봅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위선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하는 말을 자신들이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선적인 기독교인들을 하나님께서는 크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불신자보다도 못하게 살면 불신자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2:48의 말씀처럼 많이 받은 자에게서 많이 찾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를 향해서 욕하는 내용이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 예의바른 사람, 독선적인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 위선적인 사람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 관계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일상적인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본받지 못했습지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는 아버지의 애끊는 사랑을 본받지 못했습니다. 대적하는 세상을 향해 독생자를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을 본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지 못했습니다. 대적하는 세상을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못박고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지 못했습니다. 비기독교인들을 향한 저희의 사랑없음과 저희의 오만함을 용서해 주시고, 저희가 하나님 아버지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처럼 그들에게 겸손한 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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